디테일이라는 바늘, 용기라는 꽃

예민함이 상처가 아닌 감각이 되는 순간

by 서나연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자주 죽고 싶어 했어?


나는 십오 년 전까지만 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걸 믿지 못했다. 우주에 갑자기 던져진 존재인 우리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굳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더라도, 죽음에 대한 상상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기본값의 고민이라 믿었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서른 중반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알게 되었다. 오늘이 축복이라 믿는 사람만큼이나, 그냥 '별 생각 없이'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사람이 세상엔 더 많다는 것을. 거창한 고민에 빠지는 건 삶을 허무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담백함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친구의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아마 내 안의 물이 너무 자주 출렁여서일 거야. 나는 속이 너무 여리거든. 비바람 앞에 놓인 풀 한 포기 같아서, 그냥 누군가 나를 뿌리째 뽑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최근 읽은 정지우 작가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디테일에 예민한 사람은 확실히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삶을 산다. (···) 행복은 디테일에 있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게 디테일은 행복보다 불행에 가까웠으니까. 세상을 디테일하게 기억한다는 건, 남들이 흘려보내는 통증까지 세밀하게 쪼개어 아파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게 예민한 감각은 수천 개의 바늘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과 같았다. 디테일은 나를 풍요롭게 만들기보다, 나를 풀 한 포기처럼 가늘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특히 엄마의 감정에 대해서는 거의 신(神)적인 레이더가 작동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엄마가 나를 부를 때면 1초 만에 수많은 정보가 동시에 재생된다. 이름 뒤에 붙은 한숨의 길이는 어느 정도인지, 오늘 바른 비비크림이 미간 어디쯤에 뭉쳐 있는지, 내 눈을 바라보다가 몇 초 만에 시선을 피하는지.


얼마 전, 나는 그 레이더를 가동하는 대신 엄마에게 내 마음을 먼저 꺼내 놓았다.


엄마, 걱정 마. 넘겨짚는 거 아니야. 기분이 별로라면 아니라고 말해줘. 나는 그냥 엄마가 걱정되고, 엄마에 대해 더 알고 싶을 뿐이야.


47311954-ai-generated-9227230_1920.jpg ⓒ Pixabay

내 예민함이 엄마의 아픔까지 대신 짊어지려 했던 걸까. 공감은 가끔 독이 든 성배와 같아서 함께 아픈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거리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투명한 물이라도 담아둘 그릇이 없으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듯, 내 예민함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바늘을 가슴에 품고도, 내 마음을 조금 더 다정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큰 변화다. 바로 '마음껏 연약해지기로' 마음먹는 것. 흔히 말하는 외유내강(外柔內강)의 진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행복이 반복의 욕구라면, 직선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매번 새로운 통증을 마주해야 하는 인간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작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내가 수영장으로 가고, 매트 위에서 땀을 흘리며 몸을 단단하게 굽는 이유도 결국 이것이다. 마음이 제아무리 얇게 쪼개져 예민하게 흔들려도, 그것을 온전히 담아낼 몸이라는 그릇이 튼튼하다면 그 예민함은 비로소 ‘상처’가 아닌 ‘감각’이라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얼굴을 더 가까이서 쳐다보는 일,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기꺼이 닦아주고 싶다고 느끼는 일, 가족과 뽀뽀를 하다가 문득 이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세어보며 혼자 슬퍼지는 일. 이 모든 '약해지는 마음'을 멈출 재간은 내게 없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내 마음이 아무리 약해져도, 그것을 지탱할 몸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디테일한 나에게 행복은 여전히 어렵고 먼 숙제다. 그럴 때면 친구의 말을 붙잡는다.


그렇게 흔들리는 게 진짜 용감한 거야.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거든.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를 위해 속삭여주는 작은 언어들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 또한 디테일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보는 일이 백지 위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막막할 때가 있다. 그래도 기꺼이 떨어뜨려 보려 한다. 내게는 그 먹물을 꽃으로 보이게 만드는 내면의 힘, 나만의 디테일이 있다고 믿으니까.


용기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강함'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 끝에는 아주 세밀하게 조각된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찰랑이는 행복을 쏟지 않고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나는 오늘 내 안의 그릇을 조금 더 깊고 단단하게 매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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