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에서 바다까지
언젠가 술자리에서 친구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너 나중에 죽어서 화장하고 나면, 뼛가루를 어디에 뿌려주면 좋겠어? 산? 강? 아니면 수목장 같은 거?”
보통은 추억이 깃든 장소나 탁 트인 바다를 말하겠지만, 나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변기.
친구의 눈이 동그래지다 못해 질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이유를 덧붙였다.
“그냥 강이나 바다에 바로 뿌려지면 좀 시시하잖아. 기왕 죽은 거, 여행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어. 변기에 털어 넣고 물을 내리면 배관 타고, 하수구 지나고, 하수 처리장도 거쳐서 큰 강 만나고… 그러다 보면 결국엔 바다로 가겠지. 죽은 뼛가루도 흘러가는데, 그 정도 모험은 해야 재밌지 않겠냐?”
친구는 농담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바다에 ‘툭’ 던져지는 것보단, 가장 좁고 더러운 곳에서 시작해 가장 넓고 푸른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 그 고단한 과정이 내게는 어떤 꿈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바다는 모든 것이 모이는 곳이다.
정수 처리 시설을 거친 물이 모이고, 플랑크톤이 서식하고, 해류가 대륙의 틈새를 부지런히 이동해 하나가 되는 곳.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싸우고 멀어진 친구를, 애틋하게 헤어진 연인을, 먼저 떠난 부모님을. 그리고 학교 앞에서 샀다가 이틀 만에 별나라로 보냈던 노란 병아리와, 지상에서 졌던 목련 꽃잎까지도.
나는 그 광활한 바다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함께 둥둥 떠서 꽃놀이를 하고 싶었다.
울렁이는 감정을 파도라고 생각하고, 나라는 존재를 바다의 작은 물방울이라고 생각하면, 내 안의 불안마저 위대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죽음의 방식으로 ‘변기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을 상상했다.
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당장 죽을 수는 없으니, 나는 변기 대신 수영장으로 갔다.
스물여덟의 여름, 동네에서 가장 큰 수영장에 등록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묘한 오기가 하나 있었는데, 강습을 받지 않고 혼자서 수영을 터득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인간도 원래 물에서 왔으니, 수영은 기술이 아니라 본능일 거라고 믿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어려운 건, 내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내가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겁도 없이 자유 수영 레인에 뛰어들었다.
물이 귓구멍으로 왈칵 밀려 들어오고, 숨을 어디서 쉬어야 할지 몰라 몇 번이나 짠 물을 삼켰다. 켁켁거리며 레인 끝에 매달려 숨을 고르다가도,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도저히 감각을 모르겠으면 물 밑으로 잠수해 고수들의 발차기를 훔쳐봤다. 오지랖 넓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으면 뻔뻔하게 묻기도 했다.
호흡은 어떻게 해요?
할아버지는 침을 튀기며 본인의 20년 수영 경력을 자랑하느라 바빴지만, 어차피 얼굴에 묻은 건 다 물이라 괜찮았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수영은, 6년 후 강사에게 배운 정석과는 조금 달랐다.
최근에 수영을 다시 배우며 느낀 건, 강사님은 항상 ‘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수영에 정답은 없지만 틀은 있다고. 그 틀이 처음 운동을 배우는 사람에게 안전한 지붕 같은 존재라면, 나는 가끔 지붕 없는 천장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수영인들의 로망이 결국엔 틀이 없는 바다 수영인 걸까.
누군가는 왼쪽 어깨가 솟아오르고, 누군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만 돌린다. 나에게도 나만의 삐뚤빼뚤한 자세가 생겼다. 폼은 좀 이상하지만, 내 우울감을 달래기에는 최적의 자세였다. 팔과 다리를 믿고 물을 휘감으면, 어느새 몸이 둥실 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물 위에 뜬다는 건 생각보다 큰 사건이었다.
지구의 중력에 짓눌려 살던 몸이, 잠시나마 그 손아귀를 벗어나는 일.
물에 귀를 잠그면 세상의 소음이 차단되고, 내 심장 소리만 둔탁하게 울렸다. 숨을 참고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나는 내 몸이 액체로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몸이 원래 물이었던 것처럼.
수영장 물속은 고요했다. 어둡고, 먹먹한 곳. 맘껏 소리 질러도 아무에게도 닿지 않고, 아무리 뒹굴어도 방해되지 않는 나만의 방. 그 물속에서 팔을 젓다 보면, 나는 변기 배관을 타고 흐르는 뼛가루가 아니라, 바다를 향해 헤엄치는 거대한 생명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나를 지탱하는 수영 근육은, 모두 스물여덟 그 여름 한 달 동안 치열하게 다져진 것이다.
영화 <소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바다를 찾고 있어요.” 라는 어린 물고기에게 늙은 물고기가 말한다. “여기가 바다야.” 그러자 어린 물고기는 실망하며 대답한다.
“여기는 그냥 물이잖아요. 저는 바다를 원한다구요.”
보통은 “네가 있는 이곳이 이미 꿈꾸던 곳이니 만족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그 말이 왠지 서글펐다. 여기가 바다라는 걸 알아버린 삶은, 더 이상 꿈꿀 곳이 없는 삶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착해 버린 삶은 시시하다.
차라리, 내가 있는 곳이 변기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지금 내 현실이 비록 좁고 구질구질하더라도, 흐르고 흘러서 언젠가 저 넓은 바다에 닿을 거라는 믿음. 그 ‘꿈’ 하나로, 나는 하루를 더 살았다.
오늘도 변기 물을 내린다.
콰르르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저 물은 하수구를 지나고 강을 건너 바다로 가겠지. 나 대신 먼저 가서, 내 병아리와 목련에게 안부를 전해주겠지.
나는, 그런 엉뚱한 상상에 자주 매달렸다.
가장 작은 물에서 가장 큰 물을 상상하는 힘.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막으려면, 때로는 그런 상상이 필요했다.
가장 좁은 곳에서 가장 넓은 곳을 떠올리는 일.
죽어서 물이 되는 대신, 살아서 물을 가르기로 했다.
내 몸이라는 그릇에 물을 담는 게 아니라, 내 몸이 물이 되어 흐르는 시간.
그 흐름 속에 있는 한, 나는 가라앉지 않는다.
변기에서 바다로,
죽음에서 삶으로.
나는 오늘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