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아야 부부라고
굳이 이곳까지 남편과 함께 살겠다는 이유 하나로 하고 있던 일들을 멈추고 온 것은, 신혼 때에 같이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와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려 함이었다. 살던 대로 살면 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많은 친구들이 있어 심심치 않게 살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부부로서 앞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맞출 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나의 아빠는 홀로 유학길을 떠나셨다. 아빠도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가는 심정이 힘들었겠지만, 아빠가 곁에 없는 채로 나를 길러야 했던 엄마를 돌이켜 보면 매일을 '잘 살아야한다'는 다짐을 해내듯 살고 있던 것 같다. 아빠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영상통화 같은 매체도 없었으므로 한 번씩 하는 통화로나마 아빠의 존재를 확인해야 했고, 어떤 때에는 '엄마, 나 아빠 없지?'하고 묻기도 했던 게 생각난다. 딸이 아빠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것,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얼마나 사무쳤을까. 이제 갓 서른이 된 엄마가 남편과 떨어져 의지할 수도 없이 지냈던 것을 지금의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 매일을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해내셨던 게 아닐까 싶어진다.
아빠는 6년 뒤 귀국했고, 그 때부터 같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금 맞추어야 했던 부모님은 꽤 자주 다투셨다. 8살 내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때였던 그 시기에, 오죽하면 선생님이 검사하시는 일기장에 '엄마 아빠가 오늘도 싸웠다'라고 써서 엄마를 선생님 앞으로 불러내기까지 했을까. 결혼 후 6년 이상을 각자 방식대로 살다 보니 맞추어야 할 게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간극을 무탈하게 이겨내기에는 엄마에겐 지난 세월의 원망이 있었을 수도, 아빠에겐 미안함이 앞서지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까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 해도 부부란 같이 살다보면 또 서로에게 익숙해지게 되니 오랫동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경우를 보면서 결혼을 한 이상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나였다.
그의 발령으로 인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두렵기도 했다. 생각한 적 없던 삶의 방향이 내게 놓여 있었으니. 그와 여러 방향을 생각했다. 떨어져 살다 그가 다시 수도권으로 발령을 받아 오는 방법을 가장 원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불확실성에 신혼 초기를 걸어두자니 혹여 그 기간이 더 길어지면 어떡하나를 계속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불안한 채로 떨어져 살며 언제 같이 살지 기도만 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까. 내가 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가진 걸 놓아보면 어떨까. 이 고민으로 몇 달을 생각했던지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뒤바꼈다. 그도 나도 서로 곁에 있지 않으니 마음이 계속 흔들리기만 했다.
그러다 마음을 굳히게 된 건 일이 바빠지면서 내가 점점 나를 잃어가는 듯했고, 나를 무한하게 믿어주는 남편과 함께 하며 나를 다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더 들었기 때문이었다. 힘들어도 혼자 힘든 것보다 같이 힘든 게 낫다는 그와 나의 판단 끝에, 급하게나마 같이 살 계획들을 세웠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 즈음에 엄마의 심장 수술도 있었고, 어머님의 상태도 오락가락하던 때라 참 정신이 없었다. 정리해야 했던 것들도, 지켜내야 할 것들도 많았던 우리 부부의 같이 살기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같이 누워 잠들고 일어나는 일이,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2인분의 빨래를 해 내는 일이 결혼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시작된 우리는 아직 이 모든 것들이 설레고 귀중하고 감사하다. 같이 살아야만 알 수 있는 서로의 모습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 마음으로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기를. 같이 있어야 완벽해지는 두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