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 만난 그와 35년 전 결혼을 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우리 두 사람을 닮은 아이들을 낳아 함께 키웠고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다. 그와 나는 심지어 이민이라는 도전도 감행하였고 31년간 모험 같은 일상을 함께 했으며 어느덧 찾아온 익숙함과 친밀함의 평안도 함께 해왔었다. 나이 들며 건강의 문제들이 나타났었지만 나잇수가 늘듯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했었다.
다소 예민하고 까다로운 편인 나와 달리, 그는 언제나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던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건장한 편이었던 그는 자신의 체중에도 관대하며 긍정적이었으나 얼마 전 인공관절대체수술 후, 별 노력도 없이 체중 감량을 달성하곤 미모에 한껏 자신감을 보이던 귀여운 62세였다. 아직 아이들이 미혼이라 간절한 장래희망이 할아버지이던 그는 한때 교회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아낌없이 나눠주던 캔디맨이었다.
토요일 그는 아들아이와 함께 헤어컷을 하러 미용실엘 갔었다. 같은 미용실을 다니면서도 동시간에 함께 간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아들아이가 자신의 이발값을 내준 것이 아주 행복했던지 미용실에서부터 집에 돌아와서 까지 자랑이 끊임없었다. 주일엔 언제나처럼 오전 7시 교회를 향해 떠났을 거고 8시 예배를 드리고 내가 도착한 12시 예배 때엔 장로로써 성찬위원을 맡았었는데 검정이나 짙은 남색 정장 차림의 다른 분들과 달리 밝은 갈색 정장차림이었다. 간밤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 겨우 새벽녘에 잠들어 그의 옷차림을 보지 못했었기에 나는 TPO에 맞지 않는단 생각에 그의 튀는 OOTD에 입을 삐쭉하며 다음번 성찬식엔 반드시 일어나 양복색깔을 봐주어야겠다 생각했었다. 월요일 아침엔 교회일을 보고 오후엔 고장 난 티브이를 고쳐준 친구집에서 새로 태어난 티브이를 픽업해 와 뿌듯해했고 딸아이는 오는 주일 아버지 날에 어느 식당 가는 게 좋을지 아빠와 얘기를 나눴었다. 화요일엔 오랫동안 주차돼 있던 아들아이 차를 데리고 나가 말끔히 세차해 온 후, 퇴근한 아들에게 자신의 돌발적 선행을 어린아이처럼 으스대며 자화자찬했으나 아들아이는 아들답게 시크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언제나 그들의 공통 관심사인 야구와 축구 얘기로 곧 절친 모드로 신나 있었다. 수요일 점심엔 친한 동생과 순댓국 한 사발을 맛나게 비웠고 저녁 수요 예배를 드리고 언제나와 같이 만나는 사람마다 유쾌한 인사를 나눴었다. 집에 돌아와 2층 복도에서 마주친 딸아이와 습관성 포옹을 했고 그날따라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남편은 목요일 이른 아침, 다른 날과 달리 기상하지 못했다. 잠자는 모습으로...
수많은 분들이 그를 위한 예배에 참례하여 애도하며 하늘나라로 떠나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어느 해인가 아들아이의 아버지날 선물이라 특히 좋아했던 양복을 입고 그는 사랑하는 교회 대예배당에서 누운 채 그곳을 떠났었다. 금빛 명패에 아로새겨진 그의 이름을 눈물로 흠뻑 젖은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으며 나는 그냥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었지만 가슴속에 울리던 그의 음성 ' 그만...' 그래서 손수건과 정신줄을 말아 쥐고 그를 보냈었다.
하관예배 때 그가 담긴 작은 상자를 끌어안고 눈도 뜨지 못한 채 그치지 않는 눈물을 쏟으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예배는 시작되었지만 난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그때 그가 보였다. 저 멀리 20대의 그가 씩 웃으며 서 있었다. 너무 놀랐고 또 반가웠고 고맙고 아깝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에 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속엣말로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반복했었다. 그는 정말 끝끝내 그곳에 서서 씩 웃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아주 특별한 작별인사를 했다.
이후 여러 교회 분들의 꿈에 그가 출연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또 누군가의 꿈에서는 "서로 사랑하고 살다 만나자"라고 했대고 " 또 다른 분의 꿈에서는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아요"라고도 했다고 한다. 또 누군가에겐 그냥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왔었고 우리 아이들에겐 일상 중 모습으로... 또 누군가는 꿈에서 하얗고 큰 학을 보았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듬은 듯 놀랍도록 큰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맡고 있던 소그룹의 피크닉이 배경이라 그분은 꿈에서도 그 학이 그 임을 확신했었다고 했다. 그는 누군가에겐 운전석 옆자리 목소리로도 왔었다고 한다. 직업 특성상 일과 중 운전하며 이동하는 일이 많은 분인데 그 시간마다 그분은 갑자기 떠난 그의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바로 조수석에 앉아서 얘기하는 듯한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 집사님, 우리 집 사람 잘 부탁해요"라는...
우린 가끔 투닥대기도 했던 보통의 부부였지만 그가 떠난 후, 어떤 갈등의 때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지난날의 그 어떤 갈등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다만 그와의 모든 순간은 아련한 추억일 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세상에서 제일 친했고 만만했고 친숙함이 내 몸 같았던 친구를 잃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 달여가 지난 시점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나의 인식을 점검한다. '그는 이제 여기 없고 거기 있다.' 그런데 여전히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 사진 속,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 아침 인사를 하다가도 어쩜 그렇게 안개처럼 아침이슬처럼 사라졌는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요즘 나의 애창곡은 " 천국에서 만나보자"이다. 혼잣말처럼 나도 모르게 그 구절을 읊조리곤 한다. 아이들과 함께, 남은 부모 중 한 사람으로 나는 살아내야 한다. 애도의 기간이 정해져 있을까? 누군가는 어서 기운을 차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충분히 슬퍼하라고도 한다. 또 한 친구는 인간으로서 망각 시스템이 작동할 테니 슬픔이 옅어질 날이 올 것이라는 팩트를 조심스레 얘기하기도 했다.
예기치 않았던 슬픔의 폭탄을 맞은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멀리서 보이스톡과 카톡으로 함께한 친척들과 그와의 모든 작별의 일정을 함께 한 골육과도 같은 친구들 그리고 교회 식구들은 그들의 사랑으로 우리의 슬픔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전쟁통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일상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한 달쯤 된 시점, 아이들과 나는 그의 명판 제작을 위한 시안을 준비했었다. 영어권에 살고 있으니 한글과 영어를 함께 사용하여 표기했는데 그를 향한 우리의 메시지는 " Love you. Thank you. See you in Heaven"
아직 우리 집의 무드는 별 수 없이 슬픔이다. 그러나 우린 그가 슬퍼하는 우리를 슬퍼할 것 같아 미안하다. 그는 늘 장례예배에 다녀와선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의 장례 예배 때는 모두 즐겁게 웃으며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크리스천인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의 생의 마감은 고난 많은 불안정한 환경인 세상을 떠나 진짜 고향인 완벽한 환경,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니 마땅히 성취의 날, 기쁨의 날이므로... 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온전히 지키진 못했고 이 즈음 에야 지켜가려고 애쓰며 서로를 위로하는 시기에 진입했다.
그를 보내고 그가 없는 예배당으로 첫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기 전, 그와 내 이름으로 드리는 마지막 헌금을 준비했었다. 헌금의 항목을 표기할 때, 나는 그가 천국에 갔음을 알면서도 감사 헌금으로 표기할 순 없었다. 조금 생각하다 주일 헌금으로 표기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와 내 이름이 나란히 쓰인 마지막 헌금 봉투였기에...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이 최근 우리 가족의 목표이다. 사랑이란 실은 감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도 의지의 산물이듯, 기뻐함도, 쉼 없는 기도도 모든 시시콜콜한 일상의 감사도 모두 특별한 은혜에 힘입은 의지일 테니.
그는 우리 곁에서, 이 땅에서 떠났다. 하지만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곳에 있다. 이 땅의 삶이 안개이며 이른 아침의 이슬이니 이곳에서는 누구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 마땅함을 인정해야 하겠지.. 그러나 진짜배기 그는 오직 사랑만 남은 그는 사랑으로만 가득한 그곳에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천국에 간 그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더욱 견고하고 안정적인 사랑으로 완성된 것 같다.
사랑해, 고마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가장 멋졌던 나의 친구, 나의 영원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