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4)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운전을 30여 년 했으면서도 여전히 어렵다. 내비게이션이 생기기 전엔 지도 읽기에 한해서는 난독증이라 할 만해서 더욱 어려웠었고 장거리 운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운전기피자이다. 그러나 그는 공간감각능력이 남달랐던지 일단 길눈이 밝았고 운전도, 젊어서는 스피드도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유능한 “김기사”였다. 어디든 내가 가야 하거나 가고 싶은 곳은 그와 함께 움직였었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난 후, 내가 가는 모든 장소는 그와의 추억으로 즐비하다. 일주일치 장을 보던 슈퍼마켓도 한국식품점도 쇼핑몰도 공항도 자주 가던 식당과 카페도 미용실도 주유소도 바닷가도 모든 도로도 다 그와 함께 했었기에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나는 눈물이 차올랐다. 슈퍼마켓에서 카트를 밀고 오던 그의 모습, 쇼핑몰에서 공항에서 바닷가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일상, 그가 운전하던 차 안, 옆자리에 앉았던 나와 얘기를 나누던 그의 목소리가 모두 그립고 그립다. 특히 힘들었던 곳은 교회였다. 새 가족부 담당 장로로 섬기던 그는 1부 예배부터 3부 예배까지 늘 교회에 있었다. 주일 내내 예배당 여기저기를 다니며 인사를 나누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더욱 그랬다. 그리고 언제나 3부 예배를 드리러 온 내게 와서 모닝 농담을 하고 가곤 했었다. 그래서 찬양을 부르는 시간엔 여지없이 손수건을 꺼내 들어야 한다. 함께 부르던 찬양 중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주로 일어서서 불러야 하는 찬양 시간에 나는 일어서지 못하고 앉은 채 찬양하곤 하였다. 천국환송예배를 앞두고 목사님은 그가 즐겨 부르던 찬양이 무엇이었나 물었었다. 찬양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함께 있던 친구가 지난 환갑 기념 여행 때 얘기를 꺼냈다. 그의 성도회에서는 환갑을 맞아 부부동반으로 피지 여행을 함께 갔었다. 마지막 날 밤, 모두 둘러앉아 여행의 소회를 나누는 시간이었단다. 차례가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의 한 소절을 부르고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마 그때 나는 느닷없이 찬양을 시작한 그의 엉뚱함에 당황하여 살짝 눈을 흘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예배 때 나와 회중은 이 찬양을 함께 불렀었다.
그가 떠난 후, 구글이 불러다 주는 추억의 사진들은 나의 눈물버튼이 되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물론 나와 아이들 심지어 어떤 풍경의 사진조차 그가 눈에 담아 찍었다고 생각하니 귀하고 귀하다. 새 가족 부와 함께 교회 건물 시설 담당을 맡은 장로로써 예배당 지붕 위에 올라가 수리를 마친 지붕을 찍은 여러 장의 인증샷 중 그가 좋아하던 하늘색 호카 운동화를 신은 그의 크고 든든한 발이 보이는 사진도 귀해 저장해 두었고 딸아이 화장대를 사러 나간 가구점에서 그는 화장대 사진을 찍어 두었었나 본데 그때 그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이 귀해 또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그의 전화기에는 피지에서 찬송가 301장을 부르던 모습의 영상이 남아있었다. 건장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찬양을 먼저 하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우렁차게 찬양을 부르던 모습, 또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표정으로 소회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마음이 무너졌다.
어쩜 그렇게 떠났을까?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난 그였기에 더욱 애닯고 애닯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앙”라는 단어가 나를 압도하였다. 다시 큐티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기도의 시간 그저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주님께 내가 주님의 자녀가 맞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재앙이 닥친 건지 만약 아니라면 간절히 부탁하오니 지금이라도 그 택하신 백성의 이름들이 적혀있다는 생명책에 내 이름을 써넣어 주시길 기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부모님도 남편도 없는데 남은 두 아이의 엄마로 이 땅에서 이 아이들 자리 잡게 하고 떠나야 하니 하나님은 내게 있어야 한다고 통곡했다. 그때 내 안에서 조용히 찬양이 들려왔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성도로써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던 나의 억지에 내 안의 성령님은 이와 같이 조용히 내게 말씀하셨었다. 어느 새벽 큐티 시간, 말씀 묵상을 마치고 기도하기 위해 엎드린 내게 성령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니라 ’ 말씀하셨다. 얼른 몸을 일으켜 성경을 찾아보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울음이 터져 나왔으나 옆에서 잠든 딸아이가 있기에 한껏 숨죽여 울음을 삼켰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언하셨다. "평안이라 재앙이 아니니라”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니라”가 아니라 "평안이라 재앙이 아니니라”“였다. 평안이 먼저였다. 이 일을 평안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일까? 그는 주님께로 떠난 것이니 이제 우리는 평안하라는 말씀일까? 그 시간 내게 그 말씀은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었다. 또한 불확실하고 불안한 내일에 좌절하고 있던 내게 주님은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하셨다.
어느 날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교회 식구들이 그를 꿈에서 만났던 얘기들이 생각났다. 그때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다른 분에게는 “서로 사랑하며 살다 만나자”는 당부로 또 다른 분에게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위로로…. 그 모든 것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그는 하나님께 갔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일하며 서로 사랑하고 살다 다시 만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실은 나도 그의 꿈을 꾸었었다. 한 젊은 집사님의 꿈에 “서로 사랑하며 살다 만나자”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날이었다. 왜 내 꿈에는 나오지 않는지 섭섭한 마음을 잔뜩 안고 잠든 날이었다. 깨어나기 직전, 확실하게 본 영상과도 같은 장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선명하다. 파란 하늘로부터 목련 나무 한 그루가 내려다 보인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백목련이 없다. 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목련이나 모두 자목련들 뿐이다. 그런데 꿈에서의 목련 나무에는 단지 네댓 송이였으나 아주 탐스러운 하얀 목련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조망된 그 나무의 가지는 하늘을 향하지 않고 늘어 뜨려 진 채 자신이 심 기워진 땅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그다음 장면은 마치 카메라 앵글이 이동하기라도 한 듯 동그랗게 그 심 기워진 땅이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지?”라고 말하다 잠에서 깨었었다. 꿈에서 나는 그 나무가 그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 같다. 또 다른 꿈은 30대 초반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이제 자신은 다른 가족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도 황당하여 무슨 소리냐고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그는 한껏 난처한 표정으로 미안해하며 그렇게 되었다고 이젠 너희들 셋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여전히 나는 화를 내다 꿈에서 깨었던 것 같다. 그 꿈을 꾸고난 후에는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왜 내 꿈은 다른 분들의 꿈에서 처럼 안정적인 분위기의 뜻깊은 메시지가 아니었는지 …. 그래서 이후 나의 기도 중 빠지지 않는 한 소망은 “주님, 꿈에서 꼭 그를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서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다시 한번, 아니 한번 만이라도 우리의 언제나처럼 내가 다시 그의 두툼하고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서로서로 애써 힘을 내어 활기를 내보려 하지만 우리 집의 배경은 여전히 쓸쓸함이다. 사진 속 그의 옆에 있는 하얀 양란 화분에 얼음 4개를 올려놓으며 그를 바라본다. “잘 지내지? 당신은 정말 최고야! 멋진 내 사랑. 보고 싶어 , 정말.” 그리고 그를, 그가 웃고 있는 사진틀을 가슴에 품고 꼭 끌어안았다. “나의 영원한 사랑,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