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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May 05. 2021

나라는 책




    단 한 편의 시를 간직하기 위해 한 권의 시집을 샀던 날을 기억해. 난 다른 시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29페이지에 쓰인 간결한 시 한 편에 매료되었고 홀린 듯이 시집을 샀지. 이후 그 책은 내 서재 책장 구석에 숨죽인 채 방치되었고, 29페이지의 시 외엔 그 시집의 단 한 편의 시도 읽지 않았어. 관심도 없었으니까. 이따금 시가 생각날 때, 접어뒀던 페이지만 뒤적여 그 시를 읽을 뿐이었어.


    사람도 그런 거야. 그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몇 가지 장점만 보고 그 사람을 소유하려고 곁에 두지. 아니, 내가 좋았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으면 그 사람을 내 옆에 둬야 하는데 그 사람의 ‘일부’만 가져올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통째로 곁에 둘 수밖에 없어. 거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는 거야.


    너는 내가 29페이지의 시를 읽고 매료되었듯, 29세의 나에게 매료되었고, 내가 그 시집을 사서 내 방 책장에 놓아두었듯 나를 사귀게 된 거야. 한 편의 시를 제외한 그 시집의 다른 시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처럼 너 역시 29살의 나, 그해의 나 외에는 관심이 없었어. 다만 나를 소유할 방법은 그뿐이었기에 그렇게 한 거지.


   내가 그 ‘시’를 읽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시집’을 읽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너도 ‘한 때의 나’를 알고 만났다고 할 순 있지만 ‘나’의 전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는 거야.

    다만, 내가 고작 시 한 편 때문에 그 시집을 산 걸 후회하지 않듯 너도 나의 지극히 일부의 모습을 사랑하고서 나를 사귄 걸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지.


    하지만, 책장에 자리가 모자라게 되면 그 페이지의 시만 찢고 나머지 시집을 버려야만 할 수도 있겠지. 너의 인생에서도 다른 중요한 많은 것들이 생겨나면 나는 버려질지도 몰라. 한 편의 시처럼 죽 찢겨서.




    


   나라는 책을 찬찬히 읽어줄, 앞의 내용은 결코 알 수 없다고 해도 혼자 지레짐작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결론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두고서 나라는 책을 접하게 된 그 시점부터 찬찬히 책장을 넘겨줄, 그런 사람을 찾고 있어. 그게 너였음 하고 내심 바랐던 거고.


    나는 너라는 책을 한 페이지만 읽고서 바로 내 책장에 두기로 마음먹었지만, 나머지 부분들도 읽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앞으로의 이야기가 전개되든 나는 그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예상했던 뻔한 이야기로만 흘러가 긴장감이 사라지든, 삼류소설 급의 막장 결말로 치닫든 한 페이지를 읽고 바로 책째로 가지고 온 이상, 이야기의 전개와 상관없이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겠다고. 그렇게 온전히 그 책을 다 읽겠다고 말야.



    너는 어때? 어떤 마음이었니. 꼭 말해줘야만 하는 건 아냐. 다만 나는 가끔 알 수 없이 불안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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