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눈꺼풀을 누가 확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눈이 번뜩 떠졌다.
“응?”
“그때 왜 그랬어.”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미안.”
나는 힘없이 뱉었다. 아니, 말을 흘려보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다른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술을 더 시켰고, 더 마셨고, 계속해서 서로 안 취했다고 우겼고, 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왜 그랬어.”
“미안.”
“너는 왜 그랬어.”
“미안.”
“꼭 그랬어야 했어?”
“미안.”
“너는 왜 그랬어?”
“미안.”
“그때 꼭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래야만 했어?”
“미안.”
“그때 그렇게 매몰차게 굴어야만 했어?”
“미안.”
“왜 그랬어?”
“미안.”
“왜 그랬어.”
“미안.”
누가 누구를 향해 말하는지 모를 모호한 대화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인 대화였다. 서로를 향해 총알을 쏴대는 대화였다. 맞고 쏘고 맞고 쏘고 하는 대화였다. 누구도 총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아대는 대화였다. 끊임없이 원망하고 사죄하는 대화였다. 슬퍼서 우는 건지 화가 나서 우는 건지 안타까워 우는 건지 과거의 그때가 생각나서 우는 건지 아니면 그저 술에 취해서 우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울음이 섞인 대화였다. 돌고 돌아 결국 ‘미안’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종착역이 정해진 따분한 여행 같은 대화였다.
언젠가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사과를 한 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왠지는 몰라도 이따금 막연하게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불안정한 내 청춘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그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원망일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 혼자 그것을 온전히 견뎌낼 자신이 없어, 어리광부리듯이 가장 완전한 원망의 대상을 찾은 것이었다. 내 고통을 아는 사람, 내 고통을 지켜본 사람, 내 고통의 시간 속에 함께 있었던 사람, 함께 있었으나 사라진 사람,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미안.”
우리는 마지막 ‘미안’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미안을 누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했든 그가 했든 미안은 미안이고, 그건 그를 향한 말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아니 종국적으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이기도 하니까.
누가 했든 사실상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화자와 청자와 가해자와 피해자와 사냥꾼과 사냥감이 모두 같은, 누가 되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므로.
너랑 만나게 되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꼭 한 번은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가 ‘대화’였는지는 모르겠다.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케케묵은 마음을 뱉어댔으니 그걸로 된 거다.
휴, 되긴 뭐가 돼.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스치는 가로등이 한없이 길쭉길쭉하게 늘어나 보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까이서 들었던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 미안이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어땠더라, 낮고 작게 이렇게 울렸었는데. 하고 온갖 오감을 동원해 떠올려보려 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았다.
목소리를 기억해내는 걸 포기할 때쯤이 되자, 이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던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가만있어 보자, 어떻게 생겼더라. 눈썹이 이렇게 진하고, 얇은 쌍꺼풀이 있고, 코가 오뚝하고 맞아, 볼에 점이 하나 있었지, 입술은 이렇게 아랫입술이 하트모양으로 갈라졌고, 또, 또. 생각할수록 너무 보고 싶어져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계속, 계속 났다.
그러다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목놓아 엉엉 울고 싶었지만, 택시 안이라 가까스로 참았다. 컥, 하고 울음이 목구멍에 걸리면 삼키고, 콱하고 얹히면 또 삼키고를 반복했다. 그제야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조인성이 왜 주먹을 입에 쑤셔 넣으며 울음을 참았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하는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러다 어디로 가긴, 집으로 가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술에 취하면 술이 뇌 부위 중 정서를 관장하는 ‘아미그달라’를 포함한 변연계를 자극해서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 정도로 술을 안 마셔봐서 이 나이가 되도록 몰랐다. 또 술에 취하면 옛 애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술에 취하면 옛 애인이 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취한 적이 없어서 이것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아니, 사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될까 봐 지금까지 악을 쓰고 버텨왔다. 너와 헤어지고 불면증에 시달릴 때도, 온전히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 그냥 나를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도, 친구에게 하소연하면서 그냥 펑펑 울고 싶었을 때도. 혹시나 술에 취하면 가뜩이나 보고 싶은 네가 더 보고 싶어질까 봐,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 감정을 못 이겨 너에게 전화라도 걸까 봐, 그렇게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너를 흔들게 될까 봐, 힘들게 할까 봐,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까 봐, 이를 악물고 술을 마시지 않은 채 그 시간을 참고 버텨왔던 것이다.
너는 내가 술이 조금도 늘지 않은 이유를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 것도 같다. 너 역시도 주량이 조금도 늘지 않았다는 걸, 그 이유가 나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