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둘 다 술을 한심할 정도로 못 마시는 족속이지만 기어이 술을 마시러 갔다. 일단, 그렇게 했다.
술만 마실 수 있으면 되었으므로 아무 데나 대충 들어갔다. 일본 이자카야 안주류가 나오는 술집이었다. 우리는 안주도 아무렇게나 시켰다. 모둠꼬치인가 뭣인가가 나오고 곧이어 나가사끼 짬뽕이 나왔다. 너는 메뉴판을 다시 찬찬히 정독하더니 물었다.
“하이볼 시킬까?”
“그게 뭔데.”
“몰라.”
“모르는데 왜 시켜.”
“그냥, 이름이 귀여워서.”
우리는 이쪽 분야에선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의 발전도 없다. 그게 어이없어서 서로 피식 웃었다.
“그럼 뭐 맥주 시킬까?”
“소주가 나을 거 같은데.”
나는 괜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취해야만 할 것 같은 강한 의무감이 들었다. 오늘 밤, 마냥 취하고 마리라. 아주 고주망태가 되리라.
“저기요.”
그는 여유 있게 직원을 불렀다.
“카스 두 병이랑 참이슬 한 병 주세요.”
“이슬 오리지널이랑 후레쉬 중에 어떤 거로 드릴까요?”
“후레쉬요.”
엄청난 대화였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언제 저렇게 전문가가 됐지? 능숙하게 주문도 하고. 조금의 발전도 없다는 말은 취소다. 그건 이제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구나. 그는 발전이 있었다. 나는 존경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오리지널이랑 후레쉬는 뭐가 달라?”
“몰라, 후레쉬가 좀 더 후레쉬하겠지.”
“오, 그렇구나.”
당연한 말인데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고 큰 울림과 함께 깨달음을 주었다.
참이슬 후레시는 오리지널보다 ‘후레시’하다. 나도 다음에 술집에 가서 멋들어지게 후레시를 주문해야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술이 나왔다.
그가 대충 소맥을 제조했다.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고, 맥주잔에 툭 털어 넣었다. 그리곤 소주가 낮게 깔린 맥주잔에 맥주를 채워 넣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또 넋을 놓고 만다. 와, 저런 건 언제 어디서 다 배웠지.
“친구들한테 배웠어.”
너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을 입 밖으로 뱉었나 하고 나 자신을 의심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남친 경력 11년이 전 여친 생각을 읽는 것쯤이야.
“소맥 마셔는 봤어?”
어쭈, 이제 대놓고 무시하겠다 이거지? 나는 약이 올라 냉큼 또 허세를 장전했다.
“당연하지!”
발사.
“거짓말.”
불발.
“진짜야! 마셔봤어.”
“풉, 거짓말.”
웃어? 비웃어? 허무하네. 아니, 민망하구만.
“네가 어떻게 알어?”
“너 거짓말할 때 짓는 표정 나왔어.”
그런 표정이 있긴 한 걸까.
“뭐래.”
“뭐 했어, 29살 될 때까지.”
“그러게.”
“자, 네 건 좀 약하게 했어.”
“그러지 마, 나도 소주 더 타.”
“소맥 마셔보지도 않았다면서 뭘 소주를 더 타.”
“나도 똑같이 해. 그래야 똑같이 취하지.”
“네 거 약하게 타야 똑같이 취해, 지금 그거 다 계산해서 제조한 거야. 바보야.”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너에게는 분명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대단한걸. 나는 이쯤에서 그냥 술에 대해선 그가 나보다 낫다고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한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네가 한 행동엔 다 뜻이 있을 거야.
“짠!”
쨍, 하고 잔끼리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꿀떡꿀떡, 처음 마셔보는 소맥을 원샷 했다.
“와, 너 왜 이래. 술 왜 이렇게 늘었어?”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무시하던 그가 이제 눈빛을 바꿔 경이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그럼! 내가 술 얼마나 잘 마시는데! 소맥을 안 마셔봤을 뿐이지, 마시면 아주 잘 마신다고 내가. 또 줘 봐. 나는 계속 원샷을 할 수가 있다고!”
“에이, 취했네, 취했어. 역시 사람은 안 변해.”
1초 만에 다시 너는 나를 무시했다. 어, 아닌데, 하나도 안 취했는데. 그런데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뭐야, 왜 이렇게 눈 천천히 깜빡여, 야, 한 잔 마시고 취하면 어떡해.”
“아닌데, 나 완전 빨리 깜빡이는데, 봐봐. 봐봐. 엄청 빠르지.”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눈을 빠르게 깜빡여보려 했지만, 눈두덩이에 모래주머니라도 올려놓은 마냥 눈꺼풀이 심히 무거워 버벅 버벅댔다.
“알겠어, 너 안 취했어.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소맥 마신 거 처음이네.”
정말 그랬다. 기껏해야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정도였지.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
“그러게.”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 그렇게 오래. 꿈뻑, 꿈뻑.
“술만 마시지 말고 안주도 좀 먹어.”
“그으래. 이번엔 내가 한 번 타볼게. 나는 소주랑 맥주를 1:1로 할 거야. 어때?”
“맘대로 해. 근데 너 괜찮겠어?”
“아우, 나는 완전 괜찮지. 근데 너 괜찮겠어? 너도 얼굴 엄청 빨개. 나는 진짜 하나도 안 취했어. 원샷 또 할 수 있어. 왜냐구? 왜냐면, 하나도 안 취했으니까.”
나는 서둘러 소맥을 제조하면서 말했다. 너는 얼굴, 귀, 목까지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에게 서둘러 잔을 건넸다.
“난 진짜 하나도 안 취했거든.”
안 취했다고 하는 거 보니까 너는 취한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의 짠-을 더 했고 내 눈꺼풀은 아까보다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눈두덩이를 누가 깔고 앉기라도 했나. 아우, 왜 이렇게 무거워.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 때,
“왜 그랬어.”
정적을 깨는 그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