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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Sep 15. 2023

내겐 너무 필요한 착각




카페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가방에 이것저것 챙기고 있었다.

노트북, 책, 다이어리, 에어팟, 충전기 등을 넣고 나서려다가 아 - 책 한권만 더 넣어야지 하고

얇은 책을 한 권 더 넣었는데 그 전까지는 전혀 무겁지 않았던(어쩌면 조금은 가볍다고 느꼈던)

가방 무게가 한순간에 확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고작 이 책 한 권 때문에?


너를 견디는 내 마음의 무게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견딜만 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무언가 더해지는 순간 확 무거워져 버렸다.







머리가 자르고 싶어졌다. 단발로 확, 잘라버릴까. 하지만 나는 안다. 긴머리보다 단발머리가 훨씬 관리가 힘들다는 것을. 검은머리로 확 염색해버릴까. 하지만 이 역시 나는 안다. 검은 색으로 한 번 염색을 하면 다른 색으로 염색하기 위해선 그 검은 머리를 다 길러 잘라내기까지의 시간 혹은, 아주 여러번의 탈색이 필요하단 걸. 과감하게 처피뱅을 해버릴까. 하지만 이내 그것도 포기한다. 나는 안다. 업무 미팅에서 처피뱅을 한 사람은 귀여운 인상을 줄 순 있어도 프로페셔널한 느낌은 그만큼 반감된다는 걸. 결국 앞머리를 자르긴 잘랐다. 하지만 영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얼마 전 다녀온 여행에서 나의 오래된 가위를 잃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버렸다.

참 상직적이게도 2007년에 처음 산 17년 된 17만원짜리 가위였다. 17살 때 가장 활발하게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눈썹을 덮고 눈 바로 위까지 뚝 떨어지는 무거운 풀뱅이 유행이었다. 그 앞머리의 단점은 조금만 길어도 눈을 찌르는 불편함이 있어서 자주자주 잘라줘야한다는 거였다. 나는 엄마를 졸라 큰 맘 먹고 미용가위를 샀다. 


"너는 미용 배우는 애도 아닌데 왜 이런 전문가용 가위가 있어?" 하면서 다른 반 친구들까지 쉬는시간에 줄을 섰고 앞머리를 잘라줬던 기억이 있다. 필기용 노트를 얼굴 밑에 받치고 있으면 나는 조심조심 앞머리를 잘라줬었다. 고2가 되던 18살 무렵부터는 앞머리를 길러 옆으로 넘기는 여신 머리(?)라는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앞머리를 길렀었다. 나도 앞머리를 길렀다. 유행을 따르고자 하는 맘보다는 자주 자르고 고데기를 하는 귀찮음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커다란 집게핀으로 앞머리를 턱 고정시켜놓고 하루종일 모의고사 문제를 풀던 그 시절. 앞머리 숱이 많아서 한 번에 고정하고자 큰 핀을 샀을 뿐인데 학생부 선생님은 핀이 지나치게 커서 튄다(?)며 전혀 미용목적이 아닌 실용적인 내 핀을 뺏어갔다. 하늘색, 핑크색을 차례로 뺏기고 나서 "선생님, 작은 핀을 꼽으면 한번에 안 찝히고 머리가 다 삐져 나와서 그래요. 검은 색은 튀는 색이 아니니까 괜찮나요?"라고 물었더니 "일단 핀이 크면 시선이 그리로 가서 튀어서 안 돼"라고 했다. 뭐 어쩌라는 건지. 결국 작은 핀 두개를 꼽고 다녔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앞머리가 충분히 길어서 귀 뒤로 넘어갈 때 쯤이 되자, 자연스레 집게 핀이 딱히 필요가 없어져서 괜찮아졌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도 그 가위는 나랑 함께 했고 미용가위이지만 최근에는 영수증을 자르는 등 문구용(?) 가위로 그 쓰임을 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섬세하고 한번에 샥샥 잘 잘리는 가위를 보지 못했다. 크기도 내 손에 딱 맞아 그립감도 좋았다. 어떤 문구용 가위도 그 가위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긴, 그 가위들은 17만원의 10분의 1가격도 안 되는 가위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어쨌든 2007년 이후 나는 새로운 가위는 사지 않았다. 그 가위 하나면 충분했다. 밖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가위를 써야할 때면 답답함에 내 가위가 절로 그리워졌다.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어쩌다 한 번씩 가위를 쓸 일이 생겼다. 그래서 최근엔 수납 공간이 많은 내 백팩 한 섹션에 가위를 넣어놓고 다녔는데, 아무 생각없이 공항 검색대에서 걸린 거였다.


"날 길이가 충분히 길어서 안 되겠는데요. 2층에서 수하물로 부치실래요? 아니면 기증하시겠어요?"


기증, 버린단 거 겠지.

2층까지 내려가서 수하물로 부치고 오기엔 시간이 조금 촉박했고, 검색대를 통과해서 잠깐 처리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일행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왜 그랬을까. 


'아...뭐...어쩔 수 없네. 하나 사지 뭐.'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기증할게요."라고 말하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어떻게 그냥 새로운 거 하나 사면 되겠지, 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냥 단순히 가위라서? 그냥 물건이니까?



내 가위는 버려졌을까.


여행을 다녀왔는데 당장 가위가 사라졌다. 새 가위를 사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고 가위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지만 가위를 사진 않았다. 버리고 온 가위가 계속 생각이 났다. 아, 그냥 수하물 부치고 온다고 하고 빠르게 2층에 갔다 왔으면 됐으려나. 일행에게 부탁했으면 됐으려나 그런 생각을 했다. 


앞머리를 다시 손보기 위해 들른 미용실에서 미용사의 가위를 눈 여겨 보았다. 이니셜 같은 게 각인 돼 있는 듯 했다. 사각사각. 섬세하게 앞머리를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가위는 몇 년 됐을까. 저 미용사의 미용 인생을 함께 했을까. 사악, 삭, 사각사각.



내 손에 익은 17년 된 17만원짜리 가위. 그걸 그렇게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으면서 나는 왜, 17개월도 안 된 이 작은 응어리는 버리지 못하는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 것도.







카페에 가는 길에 동물 병원에서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게 잠든 하얀 강아지를 봤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그 강아지가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게 잠든' 것이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강아지는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웅크린 걸 보니 뭔가가 두려울 수도, 추울 수도,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강아지가 걱정이 없기를 바랐다. 편안한 상태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곤히 잠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친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잘지내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어, 오랜만이다야! 근데, 무슨 일 있어?

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뇨, 무슨 일 있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 일도."

-진짜 아무일 없는 거 맞아? 야 얼굴 좀 보자. 연락 좀 자주해.

"아, 진짜 아무일 없어요. 죄송해요. 더 자주 연락드릴게요. 조만간 얼굴봐요."

그러고 선배의 근황을 전해 듣고, 몇마디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가까운 시일 내 만날 것처럼 얘기했지만 약속을 정하고 보니 둘 다 바쁜 탓에 다음 달 말쯤이나 돼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오늘 당장도 만날 수 있겠지만, 사실 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니 잘 지내? 나 좀 만날래?"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의 연락이었다. 

-어, 오랜만이야. 무슨 일 있어?

왜 인지는 몰라도 어렴풋이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같은 것이 들었다.

내가 선배에게 전화했을 때, 그 선배도 이런 직감 비슷한 걸 느꼈던 걸까.

"아... 사실은..."

동생은 대략적인 얘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동생의 얘기를 들어주고 걱정과 위로를 건네고

혼자 견디기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잠 잘 자고 밥 잘 챙겨먹으라고 말했다.

하고 보니 선배가 내게 했던 말과 비슷해서 어이없고 웃겼다. 동생은 알겠다고 고맙다고 했다. 누구든 만나 무슨 얘기든 하고 싶지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그녀의 상태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했다. 그녀가 아프지 않길, 꼭 아파야 하는 과정이라면 조금만 아프길, 짧게 아프길 바랄 뿐이었다.







카페에 챙겨나온 책 2권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샷을 추가해 주문한 커피는 바리스타의 실수인지 샷추가 없이 그냥 나왔다. 귀찮아서 그냥 마시기로 했다. 영 밍밍하다. 커피를 끊어야해, 라고 생각했다. 커피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걸 거야. 나는 생각했다. 커피를 안 마셨더니,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을 빼 버렸다니 많은 루틴에 균열이 생겼다. 마치 도미노처럼 우루루.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잘 못잔다. 차라리 커피를 마셔야지. 샷도 추가해 마셔버려야지. 그럼 명백하게 커피 탓을 할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면서 7개의 꿈을 꿨는데 마지막 꿈이 재밌으면서도 놀랍고 엄청난 통찰을 줬다. 이럴 때 꿈은 현실세계에서라면 절대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야 할 일을 한 순간에 압축해 쫙 보여주고 깨달음의 순간까지의 시간을 확 줄여준다. 꿈을 꾸는 순간은 유쾌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한데, 꾸고 나니 후련하고 개운해졌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거 였구나. 어려운 수학문제의 답안지를 보고나온 것처럼 이제 풀이 과정이야 어떻든 답을 쓰고 나오면 그만일 일이었다. 답을 알면 그 풀이 과정을 어떻게든 찾아나가면 되잖아. 그러면 찾아지는 법. 답을 아는 게 중요하지. 과정을 알아도 답은 틀릴 수 있어. 나는 그런 착각이 썩 유용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아까 책 한 권때문에 가방이 확 무거워졌다고 느꼈던 건 내 착각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페에 한 권의 책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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