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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Feb 17. 2023

불면의 굴레 끊기





무엇이든 쓰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불면의 날들이 지속되었다.

뭐가 됐든, 써야만 했다.

나는 멀미가 나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종이에 글씨를 토해냈다.


무엇이든 읽어야만 했다.

17일동안 16권의 책을 샀고, 15권을 읽었다. 하루에 한 권 꼴로 읽은 셈이다.


평소엔 10시면 잠이 드는데, 새벽 3, 4, 심지어 6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책을 읽다 글을 쓰고 글을 쓰다 책을 읽었다. 얼마 전엔 지금까지 받은 수십통의 편지가  편지함을 꺼냈.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기어코 꺼내고 말았다.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편지를 하나씩 꺼내 읽었다. 편지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평론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고 설명문도 아니고 노래 가사도 아니니까. 그래서 읽고 싶었던 걸까. 이상하게 편지는 언제 읽어도 너무 재밌고 감동적이다. 글씨에 감정이  담겨있다.


결론적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도 다 귀찮다. 결국 미운 마음을 담고 있는 것도 감정 낭비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엄청난 인류애를 발휘하고 무한히 범주를 확장해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래, 저 사람도 누군가의 아빠겠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겠지. 그래, 평범한 사람이야.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득 약간 불쌍해지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아니, 자기 자신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면 타인도 소중한 줄 알아야지, 왜 괴롭히고 그러나! 가정의 불화는 가정에서 처리해야지 왜 직장에서 난리람! 하는 억울한 마음이 솟아나기도 했다. 그 마음을 잠재우고,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쓰고, 너무 미워지면 어떻게든 안쓰러워 해보려고 하고, 그런 날이 반복됐다.






답답할 땐 여지없이 글을 썼다. 두 가지 마음이 줄 다리기 하며 팽팽하게 맞설 때면 언제나 힘이 쎈 쪽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걸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나는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






거의 밤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일은 일대로 했다. 이번 달엔 이상하게 평소보다 유독 더 바빠서 2주 연속 일주일에 5번의 점심약속을 소화해야 했다. 한달 반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당직도 이상하게 이번 달엔 3번이나 겹쳤다. 첫 주에는 출장 간 기자의 일까지 나한테 다 떠넘겨져 2인분 치 일을 했다. 거의 매일같이 사람을 만났다. 업무적인 미팅도, 개인적인 만남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취재를 하고 행사와 간담회에 참석하고 티타임을 가지고 기사를 쓰고 심지어 당직까지 섰다.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피로했다, 매우. 연차를 쓰고 좀 쉴까 생각도 했지만 괜히 책 잡히기가 싫어서 버텼다. 지쳐서라도 일찍 잠을 좀 자보려고 육체를 피곤하게 할 요량으로 운동을 평소보다 빡세게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정신이 말짱해졌다. 사랑하는 친구들의 연락이 없었다면, 나는 이 피로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미친듯이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반가운 연락들이 많이 왔다. 오랜만에 연락해도 마치 어제 연락한 것 같은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오래된 친구들의 연락이다. 안부를 주고 받고 일정을 맞춰 넉넉히 여유있게 약속을 잡았다.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짧은 몇 마디에도 듬뿍 느껴져 나는 감사했다. 하나같이 10년이 넘은 오래된 친구들이었다. 할머니 돼서도 친구하자, 다짐했던 친구들과 각자의 위치에서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게 참 좋다. 10년이 정말 금방 간다. 계 중에는 20년 된 친구도 있다. 별 거 아닌 말을 해도, 잠깐 얘기를 나눠도 그게 그렇게 힘이 된다.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 그들이 오래도록 내 곁을 지킬 것이란 믿음이 있다. 나 역시 그럴 것이고. 그들의 단점들까지도 귀엽고 그 마저도 모조리 다 사랑한다. 그들을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응원한다.







책을 읽으면서 JVKE의 'Golden Hour'를 계속해서 들었다. 'City Burns'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너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터널에 진입했을 때, 타이밍을 맞춘 듯 흘러나왔던 city burns. 터널을 통과하자 노란 터널 라이트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노을이 우릴 반겼고 그때 노래의 후렴구인 'Woo - woo - "하는 부분이 나왔을 땐 짜릿함 마저 들었다. 우린 겨울인데도 잠시 창문을 열고 달렸지. As the city burns. CF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각인된 장면이다. golden hour의 피아노 반주를 들으면서, 조금은 격렬한 그 곡의 구성을 따라가면서, 마치 하나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city burns'는 터널을 질주하고 통과하는 느낌이라면 'golden hour'는 쭈우욱 촬영한 필름을 되감기 하는 느낌인데 그 영상이 터널 안에서 재생되는 느낌이다. 통과해야 하는 구간, 이 구간을 통과하면, 이 불면의 밤을 통과하면 환한 빛이 있을거야.







의미없는 정치질을 싫어합니다. 굳이 적을 두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자꾸 그런 거짓말은, 조금 곤란하네요. 갑질은 견뎌도 거짓말은 못 견디겠어요, 그만.







책으로 도피하는거냐고요? 네, 굳이 대답하자면 그렇습니다만. 자꾸 뭘 쓰냐고요? 그냥요. 뭔가를 쓰면서 어떤 구간을 버티고 통과해 온 사람이 있다면, 아무런 설명도 필요없이 저를 그냥 이해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글쎄요. 밥은 잘 챙겨 먹냐고요? 네, 너무 잘 먹고 다녀서 문제입니다만.








15번째 책을 다 읽은 어제, 나는 간신히 12시 전에 잠들었다. 새벽에 이상한 꿈을 잠깐 꿨지만, 그리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제법 개운하게 일어났다. 나는 나를 단박에 기분 좋아지게 하는 방법을 안다.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행위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따뜻한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좋아하는 바디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얼마 전 선물 받은 맛있는 드립백 커피를 뜯어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방 안을 커피 향이 가득 메웠다. 역시나 너무 꼬숩고 너무 맛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인터뷰 기사를 검토했다. 과일을 먹고 손톱을 깎았다.


점심약속을 갔다오니 어느새 오후였다. 서둘러 기사를 마감하고 마지막 한 권 남은 책을 꺼내들었다. 방 한구석엔 14일에 받은 젤리 뭉텅이가 담긴 상자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애물단지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방치된 그 젤리상자를 보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젤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어쨌든 이것저것 골라서 담아준 그 마음이 고마워 하나 꺼내어 먹었다. 달다, 너무 달다.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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