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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28. 2022

오늘은 비가 와서




좋아하는 향을 피웠어요. 젖은 풀 냄새가 내방을 가득 채우길 원해서, 비 내리는 날이면 피우는 향을 오랜만에 꺼냈어요.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내 방엔 향이 연기를 피우며 서서히 자기 몸집을 줄여 나가요. 소모된다다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든 빠르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겠구나,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보며 나는 생각했어요. 아, 내가 좋아하는 향기가 방을 감싸 나는 황홀해져요.




메신저엔 응답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메시지가 쌓여있어요. 답장은 왜이리도 귀찮은 걸까요. 나는 응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응답해요. 침묵도 하나의 대답이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은 간혹 부작용을 낳기도 하죠. 그게 피곤하지만 모든 것에 응답하는 것이 내게는 조금 더 피곤해요.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길 원해요, 난.


요즘은 거절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제안들을 어떤 말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거절할지 나는 고민해요. 나는 원래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었나봐요. 하지만 이제 거절을 연습해요. 최대한 착한 거절을 하려면 오래 고민해야 해요. 고민의 시간을 점점 줄여가요. 하지만 아직도 해야  많은 거절이 있어요. 나는 하나에만 집중하기 위해 나머지 사안들을 정중히 거절해요. 죄송해요, 이런 식의 멀티는  못해요. 피곤해요 아니, 귀찮아요.


그간 너무 많은 약속이 있었어요. 약속은 필연적으로 피로를 낳는 법이죠. 그래서 나는 피곤했어요. 물론 유쾌한 만남들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나는 요즘 피곤해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약속들이 남아 있고, 나는 효율적으로 약속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요. 그러려면 더 많은 거절이 필요해요. 아직, 더 많은 거절이.




새로 선물받은 만년필에선 잉크가 새요. 나는 메모지에 이런 저런 낙서 비슷한 메모들을 하다 몇주 후에 읽어보곤 해요. 내가 이런 걸 썼었나, 하고 놀라기도 하고. 그건 퍽이나 즐거운 일이죠. 마치 비상금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에요. 고장나기 전 만년필로 쓴 메모를 보니 나는 더 적은 커피와 더 적은 콜라를 마시기로 결심했어요, 2주 전에. 역시 이런 류의 메모는 아무런 힘도 없나봐요. 나는 더 많은 커피와, 더 많은 생각과, 더 많은, 더 많은, 더 많은 것들을 정신없이 하며 보냈어요.




비가 오면 평소보다 따뜻해요. 비온 다음 날이 추운 법이죠. 그래서 나는 향을 피웠어요. 빗소리를 들어요. 재즈를 들어요. 내 취향을 의심해봐도 결국, 취향이 확고하단 걸 재확인 할 뿐예요. 난 역시 재즈가 좋아요. 재즈와 좋은 향과 빗소리와 타닥타닥 타자소리가 함께하는 저녁은 퍽이나 로맨틱하고 황홀해요. 맛있는 생딸기무스 크림케이크를 한 입 먹은 것처럼.


난 그저 소설 얘기나 하고 싶은데. 그냥 그저 몇몇 좋았던 문장들을 나누고플 뿐인데.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저녁 먹었어요? 뭐 먹었어요? 내일은 또 어디 가서 무슨 일 해요? 내일 모레는요? 이번 주 주말에는요? 너무 많은 질문들이 따라와요. 나는 선택해요. 다 대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늘은 비가 오고 내일은 비가 내리지 않으니 내일은 추워질까요? 나는 추운 게 싫어요. 추운게, 너무 싫어요. 그나저나 이런 걸 일기라 할 수 있을까요. 일기를 공개적으로 적는다는 건 뭘까요. 공개되어도 될 범주만큼의 일상을 적는 걸까요. 나는 점점 더 적게 내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 하면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일기를 쓰는 이유는 뭘까요.




그가 주고 간 케이크는 달콤해요. 나는 재즈와 함께 케이크를 먹어요.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조금도 조심스럽지 못하게 퍽, 퍽, 훼손하면서 먹어요. 입안 가득 부드러운 생크림의 질감이 느껴져요. 나는 다시 고장난 만년필을 생각해요. 잉크가 줄줄 새고 있는 만년필을. 그걸로 억지로 글씨를 쓰면 적어지긴 하겠죠, 적다보면 종이가 엉망이 될텐데. 그래도 메모를 끄적여볼까, 하다가 나는 이내 포기해요. 잉크는 지금도 새고 있어요.




 너무 바빴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에요. 나는 여전히 해야  많은 거절이 남았어요.  가지 확실한 것은, 거절은  적성에  맞아요. 그건 필연적으로 어떤 거짓말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거절을 해요. 거절을 위해 고민하고. 나는 피곤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피곤해요. 나는 그저 좋은 향기 속에서 재즈를 들으면서 소설 얘기나 몇마디 하고플 뿐이에요. 이런 내가, 이기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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