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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Aug 25. 2024

나의 유일한 사치



1년에 책 값을 250~300만원 정도 쓰는 편이다. 한 달에 평균 20만원에서 25만원 정도가 책값으로 나간다. 책 한 권을 읽으면 필연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 2~3권 더 생기고 만다.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무심코 들어간 광화문 교보, 합정 교보, 종각 영풍, 신촌 알라딘 등에서 스쳐 지나간 책들을 열심히 스캔한 후 또 장바구니에 담고, 매달 초 할인 쿠폰이 발행되면 담아뒀던 책들을 한꺼번에 우루루 주문하는 식이다. 그런 월간 루틴은 1년 열두달 내내 반복된다.


나는 명품 가방이나 구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물론 싸구려 10개를 사느니 질좋은 명품 하나를 사서 길을 들이고 오래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내 기준 그렇게 갖고 싶은 명품이랄게 별로 없다. 대신 나는 신간 도서와 읽고 싶은 책에 대해선 욕심을 부리는 편이다.


전자책 보다도 무조건 실물 책이 좋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행위, 그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종이의 질감과 종이와 잉크 냄새를 느끼는 행위,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 스태들러 연필로 밑줄을 긋는 행위, 모서리 귀퉁이를 접는 행위, 책 날개에 읽은 부분을 끼워넣는 행위까지 이 모든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독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역시 전자책으로 구매하는 책들도 있다. 읽은 모든 책들을 실물로 구입하는 것도 아니다. 무작정 사기 전에, 목차를 꼼꼼히 검토하고 서점에서 한두 챕터를 읽어본다. 소장까지 할 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내용이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적당히 빌려서 읽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한 번 구입한 책을 좀처럼 처분하는 경우는 없다. 알라딘에 다시 팔 책 같았으면 애초에 사지도 않았다.


하지만 물리적인 '책'을 소유하는 것 역시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비용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책을 되팔고 이 비용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사는 순환의 과정도 충분히 납득할 순 있다. 책은 '소유'보다는 '향유'가 목적이니까.





누군가 내게 물었다. 진짜 쉴 때는 뭘 하냐고.

"독서."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 나를 향해 상대는 답답하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아니, 진짜 '휴식'할 때 뭘 하냐고.

"책 읽는다니까?"

서로가 답답한 상황이다. 아니, 나는 정말 쉴 때 책을 읽는데. 일하면서 읽을 순 없잖아?

"쉴 때 독서한다고 하면 좀 재수없나."

-좀 그렇지.

"왜?"

-뭔가 너무 교양있는 취미 같잖아.

"흠."

-휴식은 말 그대로 그냥 쉬는건데, 독서는 뭐랄까 너무 '능동적'인 행위잖아. 그걸 하는 것 자체가 일이지 않어? 힘이 들잖아.

"쇼파에 누워서 책 읽는 거 별로 안 힘든데. 근데 진짜 쉴 때 책읽는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해, 그럼?"

내 물음에 상대는 고민하는 척 한다. 그 잠깐의 침묵을 비집고 나는 다시 저돌적으로 물었다.

"넷플릭스 본다고 하면 좀 덜 재수없나."

-어, 뭐 대충 유튜브 본다고 하던지.

"(……)"


독서가 '있어보이는 척'이 아니라 순수한 취미와 휴식의 행위로 받아들여지면 좋으련만.





오랜만에 비가 세차게 오길래, 반가운 마음에 드립커피를 내렸다. 나는 원래도 소문난 얼죽아인데다, 여름이라 줄곧 아이스만 마시던 참이라 드립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물을 끓이고 원두의 고소하고도 짙은 향을 음미하고는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얼음을 가득 넣을까하다가 그냥 따뜻한 채로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따뜻한 드립커피는 왜이리도 깔끔하고 맛있는지.


여름이면 꼭 한 번은 보고 마는 'Call me by your name'. 이젠 아예 여름 루틴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사운드 트랙을 틀어놓고 감상했다. Mystery of Love, Visions of Gideon이 차례로 흘러 나오고 머릿속에선 영상이 저절로 재생된다. 나는 전율한다. 역시 너무 여름스럽고, 듣기만 해도 어느 여름 프랑스 가정집이 그려지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모습이 떠오르고, 새파란 포스터도 떠오르고, 그냥 한 마디로 너무 좋다. 여름, 하면 나는 무조건 이 영화를 떠올린다.






"젤리 가게에서 알록달록 색색깔의 젤리를 한가득 살거야.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의 젤리들. 빨간색에서는 분명 딸기맛이 날 거야, 그렇지?"


너는 싱긋 웃었다.


한참 후 어느 여름날, 너는 말했다.


"그날 그 빨간색 젤리에서 무슨 맛이 났는 줄 알아?"

-응?

"벽돌 맛."





이제 다음 주만 되어도 가을이 성큼 다가올 것만 같다. 9월이 와버리면, 그래야만 하는 어떤 당위의 움직임으로라도 하늘이 조금은 높아지고 이 습한 기운도 빠지고, 아침 저녁으로 바람도 선선해지고, 그럴 것만 같다.


올 여름은 정말 우리나라 여름같지가 않아서 낯설고 어색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막상 여름이 다 간다고 생각하니 왜이리도 아쉬운지. 여름방학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초등학생처럼 나는 오래도록 이 여름을 붙잡고만 싶었다. 사실 가을이 들어서는 입추는 한참 지났고,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도 이미 지났는데. 그래도 가을이 오면, 날씨에서 습한 기운이 빠지듯이 나도 좀 더 건조-해질 수 있을까. 계절을 따라 마음의 상태도 변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사치스러운 마음인가. 아무렴 어때. 계절에 동기화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사치라면 매 계절을 허영 가득한 이 마음으로 사치스럽게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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