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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Aug 18. 2024

알았으면 싶다가도 영영 몰랐으면 싶어




어차피 잃어버릴 물건이라면 빨리 잃어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


내 손떼가 묻고 그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내 물건'이라는 애착이 생기기 전에 금방 잃어버리면, 얼마 쓰지도 못한 새 것을 잃어버려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해도 다시 새 걸 사면 그만이니까. 내가 지니고 다닌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잃어버리면 상실감이 커 슬픔은 배가 된다. 그게 충분히 낡은, 어차피 곧 새로 사야하는 물건이라 할 지라도.


근데 잃어버리면 또 어딘가에서 발견되고, 영영 잃어버릴라 치면 찾아지고, 또 찾아지고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분실 예정이라면 갖질 않을게요.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애초에 '내 거'로 들이지 않는 게 좋잖아. 어쩌다 손에 넣었다 해도 어차피 잃어버릴 거면 그냥 빨리 잃어버리고 싶은 마음. 물건이든 사람이든.






"네 글은 시적이야"


언젠가 내 글을 읽고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칭찬도 욕도 아닌, 그저 '감상'에 가까웠지만 나는 괜히 뜨끔하고 말았다. 내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으면서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온갖 이상한 말로 난해한 문장을 쓰고서 혹시라도 누군가 그 문장을 읽자마자, 단번에 의미를 간파하면 어쩌지 하는 이상한 마음. 그 마음이 속절없이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로 직설적으로 의미나 생각을 나열하기보다는 함축적이라는 뜻이야. 그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나는 이미 그때부터는 듣고 있지 않았다. 나만 아는 얘기를 최대한 비밀스럽게 풀어놓고선 상대가 알아줬으면 싶은, 그러면서도 진짜 알아차리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양가감정. 몇몇 글은 충분히 그런 게 묻어 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마음이 이미 들켜버렸을 지도.






미처 발효되지 않은 시어를 머릿속에서 굴리다 성급하게 입밖으로 뱉어버린 시인처럼 나는 급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어쩔 줄을 몰랐다. 글은 지우면 되지만,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한 번도 연애편지 쓰는 법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무심코 썼던 문장들이 훗날 연애편지가 되고, 고백인지도 모를 말들이 고백의 밀어가 되어 꿈틀거리는. 이 모든 찰나의 순간들은 결코 계산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계산이 될 것 같았으면 좀 더 촘촘하고 치밀하게 또 완벽하게 계획했을테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조금은 엉성한 순수함이 남았다. 순수는 켤코 죽는 법이 없으니까.


차마 뱉지못해 굳어 죽어버린 사어(死語)들, 탄생만 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빛났을 낱말들을 기어코 사장시켜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 그런 게 남는 게 싫어서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표현하려 하는데. 속절없이 쌓이는 밀어. 입속에서 구르고 있는 사어가 될 운명에 처한 시효 지난 낱말들. 머릿속에선 여전히 이토록 살아있는데, 생명력이 넘치는데. 입속에선 철지난 과일마냥 떨떠름 하고 밍밍해서, 결국 나는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저 머금은 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있는 김영하의 단편들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책 표지의 제목만 봐도 못견디게 사랑스럽다. 김영하의 책은 항상 나의 오만함을 보란듯이 비웃고, 나는 그 사실이 더없이 유쾌하다.


사람 취향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듯, 일련의 경험과 시행착오들이 켜켜이 쌓여 생긴 견고한 취향이 바뀌기도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큰 틀에서는 같다는,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사실이 마음에 든다.






갑자기 곽진언의 '너의 모습'이 듣고 싶어져 하루 종일 들었다. 묵직하고 낮게 깔리는 담담한 목소리.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정말 놀랐었다. 작사·작곡 모두 곽진언이 했는데, 내 마음을 몰래 훔쳐보고 나와 쓴 가사 같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가사를 어찌나 곱씹었던지. 몽환적인 전체 곡 분위기 속에서 분명하지 않게 뭉뚱그리는 발음. 퉁탕퉁탕 거리는 비트와 우웅-우웅거리는 전자음과 그 소리들에 비해 조금은 작은듯 싶은 보컬. 여러 겹으로 벌어지면서 퍼져 나는 목소리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는 마치 울다 지쳐 잠든 꿈속에서 마주한 퉁퉁 불은 내 얼굴같다.


"멀리서 바라본 너의 모습, 이렇게나 많은 너의 모습들, 하지만 오늘은 멀리서 본다. 앞으로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길. 난 이러다 말겠지 뭐. 또 네가 걱정되는데. 난 이러다 말겠지만, 왜 네가 걱정되는지. 멀리서 바라본 너의 모습, 앞으로도 사랑을, 앞으로도 사랑을, 앞으로도 사랑을……" 이게 가사의 전부다. 이, 러, 다, 말, 겠, 지, 뭐. 하고 한글자씩 끊어서 말하는 부분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일종의 고백'이 듣고 싶어져 곽진언의 것을 먼저 듣고 이영훈의 원곡을 찾아 들었다.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1절을 듣고 감탄한다. 참 정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별안간 시를 한 편 써 재꼈다. 내일 일어나 읽어보면 갈기갈기 찢어발길지도 모를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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