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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Sep 08. 2024

짜릿한 순간



좀처럼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슬그머니 자기자랑을 할 때 나는 전율한다. 그만큼 내가 편해졌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를 줬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나 사실 요즘 좀 힘들어" 라고 하면 나는 한달음에도 달려나갈 채비를 마친다. 그의 지겹디 지겨운 얘기를 나는 몇시간이고 들어줄 수 있다. 무채색의 인간에게 색채가 주입되는 순간은 더없이 짜릿해서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사실 결국에는 무채색의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노톤의 인간도 자신의 색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색깔이 있다. 그 색의 명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각자 가진 색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색을 드러내는 순간은 내게도 너무 소중하고,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그 색깔과 빛을 나는 온전히 받아낼 수 있다고, 잃지 않게 빛나게 해줄 수 있다고 줄곧 믿으면서 그들을 대한다.






간식이 크게 달달이와 짭짤이로 나뉜다면 나는 단연 짭짤이 파다. 단짠단짠의 무한한 마법 속에서도 나는 묵묵히 짠짠짠을 고집한다. 사실 원래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간식을 쌓아두고 먹지는 않지만,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 있다. 스낵의 대명사, 바로 감자칩이다! 프링글스, 헌터스 트러플 감자칩, 포카칩, 스윙칩 등등 과자를 사러가면 감자칩만 주욱 집어오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얇은 포카칩을 제일 좋아하는데, 최근 포카칩 중에서도 햇감자 포카칩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햇감자로 만든 포카칩에는 포장에 '햇감자'라고 적혀있다. 무심코 들렀던 마트에서 본 포카칩에 햇! 표시가 있는 걸 보고 짜릿하게 전율하고 좀비처럼 우어어어 하면서 집어왔다.


정말 맛의 차이가 있을까 반신반의 했는데, 햇감자로 만든 포카칩이 훨씬 더 맛있었다. 감자 자체가 맛있으니 감자칩이 더 맛있을 수밖에. 원래도 포카칩을 좋아하는데 햇감자 포카칩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빈 봉지를 접어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그 길로 현관으로 가 다시 신발을 챙겨 신고 추가로 포카칩을 사러갔다. 마트에 햇감자 포카칩이 있는 코너로 갔는데, 세상에나 사람들도 다 나처럼 생각했는지 좀 전까지만 해도 한가득 쌓여있던 햇감자 포카칩이 겨우 4봉지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4봉지를 싹 쓸어왔다. 그리고 바로 옆 편의점에 가서 햇감자 포카칩을 또 두둑히 집어 집에 왔다.


이제보니 간식을 쌓아두고 먹진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나보다.






좋아하는 영화가 재개봉을 했다. 독립영화나 인디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상영시간표를 자주 확인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걸려있을 때 그렇게 기분이 짜릿할 수 없다. 내가 굳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스크린을 통해 '큰 화면'과 좋은 음향기기로 '양질의 사운드'를 느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은 몰입에 큰 차이가 있다.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때는 영화 중간에 울리는 전화나 메시지 소리에 자연스레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든 내 의사에 따라 영화를 중간에 일시정지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집에서 영화 보는 것이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세시간 정도의 시간을 오직 영화에 집중해서 몰입하는 경험은 영화관에서 관람했을 때 훨씬 더 잘 이뤄진다.


아, 그런데 '옆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도 있어서 복불복일 수도 있다. 가끔 옆사람이 잘못 걸리면, 영화에 온전히 집중은커녕 매우 방해가 돼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의자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재개봉 영화는 대부분 자리가 한산한 편이고 알아서 조금씩 띄워 앉기 때문에 편안하고 조용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영화를 봤을 때와 다시 봤을 때 영화가 동반해 오는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 들면 더없이 짜릿하다. 좋았던 부분이 여전히 좋기도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놀라기도 하고, 한 때 충격먹었던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세월의 흐름을 나는 한 장면에서 일순간 깨닫고 전율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참 입체적인 동물이야, 속으로 읊조리면서 영화를 또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뒤로한 채 흐뭇하게 영화관을 나왔다.






집에 있으니 너무 처지는 것 같아 노트북과 책 몇 권을 챙겨 카페에 가고 있었다. 갑자기 전투적인 음악이 듣고 싶어 최근 듣던 음악과 다소 결이 다른 노래를 선곡해 귀에 꼽고 저벅저벅 걷는 중이었다.

아니, 근데 이게 웬 일. 내가 듣고 있는 노래를 부른 가수가 떡하니 내 앞에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운동을 막 마치고 온 것 같은 운동복 차림이었다. 나는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빠르게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순식간에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어어, 여기서 뭐하세요? 근데 저 지금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에?)

-엇? 얿덟덟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스치며 저런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사실 괄호안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예기치 못한 찰나의 순간에 뱉기에는 너무 긴 말이었다. 아니, 내가 잘못 봤나.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 있긴 하겠지만, 정말 확률적으로 드문 확률일텐데. 평소에 줄곧 듣던 것도 아니고 오늘 오랜만에 들었는데.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내가 노래를 듣는 바로 그 찰나에! 내 눈 앞에!


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고,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그도 뒤를 돌아 나를 보는 게 아닌가!

-어옭(어머, 깜짝이야, 맞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자 나는 놀라서 또 말대신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고, 그 사람이 먼저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었어요. 이것 보세요." 라고 반갑게 말하며 핸드폰 화면이라도 보여주고 싶었으나, 나는 무슨 직장 상사라도 만난 것처럼 세상 공손하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며 지나가고 말았다.


평소 연예인을 보든 정치인을 보든 크게 놀라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데, 너무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 지나치게 당황했던 것 같다. 나보다는 그 분이 더 놀라셨을지도 모르겠다. 웬 여자가 말은 안하고 닭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다니. 팬이라면 팬이라고, 음악 잘 듣고 있다고 얘길하던지! 하지만 그는 다소 과격한 그의 음악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상냥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해줬다. 앞으로 노래 더 자주 들을게요.


카페에 도착했는데 실내가 생각보다 추운건지 여전히 소름이 돋아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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