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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Sep 15. 2024

기록의 역설



나는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을 때도 기록하지만,

반대로 잊기 위해서 기록하기도 한다.


흩어져버리는 시간을 오래도록 붙잡아두고 싶을 때 나는 글을 쓴다. 이 시간이 지나버리면 뿌옇게 사라질 생각, 감정, 말과 표정 등을 기록한다. 기록했다는 행위만으로도 그것은 나에게 각인되고 오랫동안 남게된다. 


반면 머릿속을 부유하며 나를 오래 괴롭히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도 기록한다. 생각과 감정을 토해내듯 기록하고 나면 툭툭 털어내고 잊어진다. 글을 쓰는 동안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그 생각과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고 기록에 몰입하다 보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기점으로 영영 잊히고 만다. 이미 정리된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것들은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기록은 잊지 않기 위해서도 잊고자 할때도 모두 유용하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한번쯤 확증적 편향이 강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소위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관점과 틀에서 진실을 재단하고 곡해한다. 세상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위해 현실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인지한다. 그렇게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된 사실만을 받아들이다 보니 그들의 세계는 점점 좁아져 간다. 


그렇게 취사선택한 정보들로 자신의 뒤틀린 신념을 살찌운다. 비대해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견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자신의 신념과 불일치하는 모든 진실과 정보, 증거는 부정하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게 그들의 특기다.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사실은 제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다보니 대화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확증적 편향'이라는 인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확증적 편향이 강한 사람과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적이 있다. 직업상 사소한 것들까지도 '팩트체크'를 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근거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기 때문'이라는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비단 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확증적 편향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보였다. 말도 안되는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으로 점철된 그의 정신세계는 평소 그가 내뱉는 말들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닐때에도 나는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내가 하루 아침에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보니 답답한 마음에 내가 찾은 돌파구는 역시나 기록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확증적 편향이 강한 사람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쓴 글들이 쌓여갔다.



그러다 문득 확증적 편향이 싫어서 쓴 글들이 나의 확증적 편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정 매순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다양한 삶의 태도를 수용하는지를 반문했을 때, 그렇다고, 적어도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았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낸 나의 섣부른 기준에 의해 지레짐작한, 그렇게 '확증적 편향이 강한 사람'으로 분류된 사람이 없는가. 나는 "없어!"라고 쉽사리 단정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확증적 편향을 경계하기 위해 쓴 글이 오히려 확증적 편향을 형성하는 역설. 저러지 말아야지, 경계하며 기록했던 일들이 내 세계의 벽을 높이 쌓으면서 오히려 시야를 좁게 만든 건 아니었는지, 지나치게 검열하고 신중을 기하는 과정을 통해 나역시 수용보다는 배제와 배척의 논리를 견고히 하지 않았는지.



기록의 역설 앞에서 겸허히 나는 나를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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