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나도 모르게 타인의 불행에서 안도의 씨앗을 줍지는 않았는지 문득 되돌아본다.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손쉬운 자위가 바로 타인의 불행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라고, 크게 불행하지는 않다고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불행이라는 연료가 필요했다. 그 연료를 장작 삼아 불을 붙이고 온기를 쬐고 나면, 적어도 혼자 춥게 덜덜 떨진 않아도 됐다. 그 연료가 남기는 매캐한 연기와 잔해가 나를 좀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이만하면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 패턴화된 자기 위로는 지나치게 수동적인 방식임을 알면서도 즉각적인 안도감을 동반했기에 제법 달콤했다. 내가 충분히 어두운 곳에 있을 땐 언제 휘발할지 모를 희미한 빛에 의존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어둠을 묵묵히 버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즉각적인 안도는 아무런 힘이 없고, 나의 내면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려 가난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불안을 잠재우고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노력했지만, 너무 힘들고 지칠 때면 다시 습관처럼 타인의 불행에 기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타인의 불행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대신 일기를 쓴다. 머릿속으로 떠도는 생각과 감정의 실체가 글을 쓰다 보면 자연히 드러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상당수 불안은 해소된다.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건 덤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모종의 자신감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게 해주는 견고한 뿌리가 된다. 글 쓰는 순간만은 누구보다 솔직할 수 있으니, 나는 그 시간을 기어이 사랑하고 만다.
지극히 소소한 일일지라도 진정 ‘감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소한 근심’을 누리는 일을 감사하게 되었다. 과장 조금 더 보태면 즐기게 됐달까. 남들의 상황과 위치와 비교해 ‘이 정도면 감사해야지’하는 건 감사의 본질과 멀다. 억지로 감사할 일을 끄집어내는 게 다소 ‘정신 승리’의 일종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 때면, 그저 소소한 근심을 감사로 치환하기도 했다.
소소한 근심거리가 나를 괴롭힐 때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반사적으로 “내가 배가 불렀구나, 이런 거나 고민하고 있다니. 참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근심거리는 순식간에 귀여운 수준이 되고 만다. 진정 인생이 험난할 때는 ‘나의 스타벅스 최애 메뉴가 이번 달까지만 판매되고 단종된다니’와 같은 소소한 근심을 누릴 마음의 여력(?)이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짧은 명상을 한다. 아침에는 ‘생의 감각’을 잃지 않고 상기하는 것이 좋으니까.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은 파헤치고, 쓸데없는 걱정은 비우고 소소한 근심은 즐기면서 나의 내면으로 침잠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군더더기들을 되도록 다 버리고 단출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끝이 있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불행’은 역설적으로 현재 내가 불행하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는 ‘안락함’을 선사한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런 날도 썩 괜찮은 날이 되고, 별것 아닌 소소한 기쁨의 순간도 큰 행복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근근이 이 안락한 불행을 누리며 끊임없이 비우고 이 속에서 안도할 예정이다. 정갈하게 비워진 마음이 공허함보다는 상쾌함으로 남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