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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Oct 06. 2024

날씨가 좋은 날엔 성수동에 가지 말아야 한다



성수동에서 열린 '작가의 여정' 브런치 전시를 다녀왔다. 아주 오랜만의 성수동이었다. 전시에 갈 겸 소금빵 맛집에서 소금빵도 포장하고, 좋아하는 브랜드 쇼룸도 둘러보고, 살까 말까 고민했던 향수 착향도 해보고, 맛집에 들러서 밥도 먹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와야지! 야심차게 계획했으나……


성수역에 내려 3번출구로 나가 몇걸음 걷자마자 생각했다.

"집에 가고싶다."


결국 전시만 둘러보고 호다닥 집에 왔다.





성수동은 과연 팝업의 성지 답게 각종 팝업 스토어와 행사, 전시, 쇼룸으로 붐볐다. 내가 간 날은 마침 어느 인기 아이돌이 오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던지 길게 늘어선 줄과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젠 정말 더이상 내가 알던 성수동이 아니었다. 문득 내가 성수동이 그토록 '핫'했음에도 자주 오지 않았던 수많은 이유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종종 성수동에 들렀던 건 2019년 초 쯤이었다. 그때만 해도 성수동보다는 건대 쪽이 좀 더 놀 곳도 많고 젊은 유동인구의 유입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홍대보다 연남동을, 합정보다 망원동을, 이태원 보다는 한남동을 좋아하는 족속이라 건대보다는 좀 더 조용한 성수동이 좋았다. 블루보틀 1호점이 성수동에 들어오면서부터 성수동의 대중적 인지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연남동, 망원동, 한남동, 성수동 모두 너무 핫해지는 바람에 발길을 끊은지 꽤 됐지만.  


무튼 2020년 전만 해도 성수동에는 작지만 분위기 좋고 커피가 맛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카페들이 꽤 있었고, 그런 곳들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성수동에 들리곤 했다. 서울숲에 들러 산책을 하고, 아기자기한 매장들을 둘러보고, 커피 맛집에서 커피를 마시면 마치 대학교 때 핫해지기 전의 연남동 구석구석을 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철물점과 공장들 건물 사이로 뜬금없이 있던 소품샵과 옷가게, 카페. 그곳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체 동네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


2년전 쯤 성수동에 갔을 때, 이미 그곳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골목마다 카페나 음식점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웨이팅을 하느라 줄을 길게 늘어 서있고, 대형 프랜차이즈 브랜드와 유니콘 기업, 신생 브랜드의 쇼룸과 팝업스토어가 곳곳에서 열렸다. 그때도 주말에는 성수동에 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평일에도 오면 안 되겠구나…싶었다.


성수동은 아예 관광지가 되어 버렸는지 일본, 중국 관광객들도 많았다. 성수동이 '서울의 브루클린'으로 소개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4위'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일까. 커피를 마시든 밥을 먹든 어디 좀 들어갈라치면 한시간 넘게 웨이팅을 해야하는 지경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정점.


지금까지 이렇게 얼마나 많은 내 최애 동네들을 잃어 왔던가. 한창 핫하다가 한물 간 신사동 가로수길(몇 년전에는 세로수길이 유행하다가 요즘은 가로수길과 압구정로데오 거리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힙지로가 된 을지로, 주말이면 연트럴파크에 발디딜 틈 없이 변한 연남동, 제2의 경리단길이 되어버린 용리단길… 예시를 들려면 수도없이 많다.


매번 반복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피로감을 유발한다. 한 바탕 유행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남겨진 주민들만 피해를 본다. 수습하는 것도 주민들의 몫이고, 결국 견디다 못해 떠나는 것도 주민들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되지 않고, 사회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는 이유다.


다음 주자는 어디? 문래동 쯤이 되려나. 나는 제발 연희동만큼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 고즈넉한 골목의 분위기 그대로 남아주기를, 주택가가 더이상 번잡해지지 않기를. 하지만 주말의 인파와 지금의 골목들을 보면 불안불안하다.





브런치 전시에 대한 글은 다음에 따로 하나 쓰기로 하고 성수동 얘기로 돌아와서,


날씨가 쾌청하고 좋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렸던 걸까. 입구마다 길게 늘어선 줄, 팝업 행사 때문에 골목 골목마다 붙잡는 사람들, 관광객들, 그냥 놀러온 사람들까지 한 데 모여 북새통을 이루던 성수동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왔다. 전시 관람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성수동에 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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