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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놈

by 이재이


피아노 학원에는 음악계 거장의 이름을 딴 방이 줄지어 있었다.

슈베르트 방, 베토벤 방, 헨델 방, 모차르트 방, 바흐 방, 쇼팽 방.


나는 쇼팽 방을 가장 좋아했다. 다름 아닌 쇼팽방의 피아노가 가장 낡았기 때문이었다. 쇼팽 방에는 검은 색 삼익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집에 있는 갈색 영창 피아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검고 윤이 반딱반딱 나는 피아노. 손을 많이 타서, 낡았기 때문에 쇼팽 피아노 건반은 부드러웠다. 소리도 또롱또롱 맑았고 왠지 그 피아노로 연주를 하면 내 연주가 조금 더 경쾌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가벼운 느낌은 덤이었다.


나는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피아노에 따라 이토록 소리와 타건감이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절대적으로 우리 집 피아노 소리가 별로고, 쇼팽 방의 피아노 소리가 더 좋았다기 보다는 두 소리가 전혀 다른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우리집 피아노도 너무 사랑했다. 특유의 몇몇 피아노 소리에서 나는 딩딩 소리도 없고, 소리가 무겁지 않되 울림이 깊었다. 그런 깊은 울림과 또롱또롱 거리는 쇼팽 방의 피아노 두 소리 모두를 좋아했다. 가끔 쇼팽 방에 먼저 온 사람이 연습하고 있으면, 모차르트 방이나 슈베르트 방에서 연습을 하다가 쇼팽 방이 비는 순간 그 방으로 옮기곤 했다. 메트로놈도 함께.



똑, 딱, 똑, 딱. 박자를 맞춰주는 메트로놈.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꼬꼬마 시절. 내 피아노 선생님은 아주 열정적인 분이셨다. 그래서 항상 박수를 치며 입으로 박자를 맞춰주곤 하셨다.


읏따 읏따 읏따, 한. 박. 쉬. 고. 읏, 따!!!

빨라 빨라, 빨라진다, 4. 분. 음. 표. 한. 박. 한. 박. 옳지옳지, 읏 따라란, 읏 따!


선생님이 옆에 있으면 메트로놈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곡이 숙달되면 자꾸 빨라지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박자에 유의하며 연주해야 했고, 혼자 연습할 땐 메트로놈이 필수였다. 똑 딱 똑 딱, 박자에 맞춰 철저히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 메트로놈의 진자운동에 맞춰 박자를 잡아갔다.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는 자세부터 배웠다.

의자에는 너무 깊숙이 앉지 말고 이렇게 걸터 앉아. 오른쪽 발은 페달 위에 올리고. 아, 아직 키가 작아서 발이 안 닿는구나, 더 낮은 의자가 필요하겠어. 나는 대롱거리는 양발을 앞뒤로 움직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손은 공을 쥔듯이. 아, 손이 너무 작구나. 그럼 계란을 쥔듯이 이렇게. 동그랗게 해봐. 계란은 없지만 계란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손목에 힘을 주진 말고. 힘을 빼고. 아주 살포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레미까지 1,2,3, 순서대로 치고 파에서 엄지로 바꿔서 다시 순서대로 솔라시도. 그래, 옳지.



"손목 떨. 어. 진. 다. 손목 꺼떡꺼떡 하지 말고!

손 동그랗게, 손에 지금 계란 어딨어, 계란?"



지금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하지 않고 그저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기만 해도 자동으로 모양이 나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목을 꺼떡이지 않으면서 동그란 손 모양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후 남에게 설명하려다 보니 더 자세히 그 감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참 복잡한 컨트롤이 필요한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목과 손 전체에 힘을 뺀다. 하지만 '동그란' 모양을 유지해야 하므로 아예 손에 힘을 전부 빼버려선 안 된다. 굳이 설명하자면 손목에는 힘을 빼고 손등에는 약간의 긴장을 주되 손가락의 첫 번째 두번째 마디는 힘을 빼 자연스럽게 건반 위를 오가도록하고 손등과 이어지는 세번째 마디에는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 자세와 손 모양에 힘 조절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순간, 뚱땅 뚱땅 거리는 피아노 소리마저 달라진다. 피아노 선생님들은 대부분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눈을 감고 연주를 들어도 내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목을 꺼떡거리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려 버린다.


발레도 마찬가지다. 가장 기본자세라 할 수 있는 앙바와 앙오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대학교 때 교양 수업으로 재즈댄스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재즈댄스는 발레의 기본기를 어느정도 요구한다며 맨 첫 시간에 앙오 자세를 따라해보라 시켰다. 무심코 했는데 선생님이 대번에 "전에 발레 배웠죠?"하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렇다고, 그렇긴 한데 10년도 더 전에 배웠다고 어버버 거리며 대답했다.


선생님은 동그란 모양을 유지하되, 팔에 힘을 주면 안된다고 했다. 동그라미가 찌그러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고 있다며 팔 전체에 힘을 빼고, 손에도 힘을 빼고 각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팔꿈치에만 살짝 긴장을 느끼라고 설명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자세라 몰랐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점점 감각에 집중해보니, 정말 팔 전체와 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어깨는 아래로 내려가 있고 목은 쭉 빼고 정수리가 꼿꼿한 느낌이 유지되는 가운데 팔꿈치와 세번째 손가락에만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는게 느껴졌다.


발레를 처음 배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누가 천장에 내 머리를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해 놓았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머리를 누가 잡아 당기고 있어! 어깨 내리고, 고개 꼿꼿하게 목 빼고. 그땐 그게 어색한 감각이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러워 진 것이다. 무려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도 말이다.






내 인생에도 지금 너무 급하다고, 지금은 조금 느리다고 쳐지지 말라고, 똑딱 똑딱 박자를 맞춰주는 메트로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일정한 속도로 페이스를 맞춰가며 무리하지 않되 나태하지 않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텐데. 하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쉬고 싶을 땐 푹 퍼질러 쉬기도 하고, 열정 넘칠땐 전속력으로 달려보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조금 걷기도 하고. 그런게 인생 아닐까. 내 인생의 박자를 맞춰주는 인생의 메트로놈을 기대하는 대신, 그저 고동치는 내 심장의 박동을 박자 삼아 조금 더 가슴이 뛰는 쪽으로 나를 이끌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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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