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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색 크레파스

by 이재이



내가 48색 크레파스를 좋아했던 건 다름 아닌 12색에는 없는 금색, 은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색을 정말 아끼고 아껴서 아주 특별할 때만 조금씩 썼다. 진짜 금과 은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은색을 처음 썼던 순간을 기억한다. 피아노 치는 내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나는 뚜껑 열린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를 그리고 까맣게 칠했다. 그리고 은색 크레파스로 신중하게 피아노 뚜껑 위를 칠하기 시작했다.


"어어, 지금 뭐 하니."

선생님이 나를 저지하며 놀라서 물었다.

"빛이 반사돼서 빤딱빤딱 피아노가 빛 나는 걸 표현한 거예요."

선생님은 그제야 나를 저지하던 손을 거두고 내가 마음 껏 검은 피아노에 은색으로 줄을 그려놓게 두었다. 그리고 그 그림이 상장 한장으로 바뀌어 돌아왔을 때, 나는 좀 더 과감하게 색을 쓰기 시작했다.


유치원 다니던 7살 때로 기억한다. 바다에서 가족들과 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다 파란색으로 채우는 대신 흰 부분을 남겨두었다. 다 그린 사람은 선생님께 그림 검사를 맡고 집으로 가면 되는 거였다. 나는 선생님께 그림을 들고 나갔다. 선생님은 "어, 이 남겨둔 흰부분은 뭐니. 파란색으로 꼼꼼하게 다 채워서 다시 오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흰부분은 파도가 부서지는 부분이에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내가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미완성한 그림을 가져온 게 아니라, 일부러 그 부분을 흰 부분으로 '남겨'두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 멋진데!" 그렇게 대꾸를 해주었던 것도 같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부터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대범하게 표현하고 색을 더욱 더 과감하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런 색으로 칠해선 안돼. 이 부분은 이 색깔로 칠해야지. 내 인생의 어른들은 적어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꼬꼬마 시절일 때만해도 '살색'이라든지 '풀색', '하늘색' 따위의 색이름이 붙은 크레파스가 있었다. 요즈음은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을 수 있어 '살색'은 없어졌다고 들었다. 하늘은 하늘색으로만 칠하고 풀은 꼭 풀색으로 칠해야 할것만 같은 느낌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는 분홍색으로도 하늘을 칠하고 보라색으로도 풀을 칠했다. 적어도 내 스케치북 위에서 나는 자유로웠고 그래서 그림이 좋았다.


대학교 때 그림 동아리를 했었다. 고대와 연합 동아리였기 때문에 한 번은 우리쪽에서, 한 번은 그 쪽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내가 그림을 출품했던 해는 고대 쪽에서 전시회를 여는 순서였다. 나는 내 그림이 전시된 것을 구경하러 갔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유 전시라 주제가 다양했는데 유독 풍경화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침묵'이라는 그림을 출품했다. 그림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귀와 입이 없다. 긴 머리카락으로 가렸기 때문이다. 입을 가린 머리카락은 여자의 몸뚱아리를 칭칭 감는다. 배경에는 거미 줄이 있다. 거미 줄에는 여러 개의 귀와 입이 걸려 있다. 어떤 입은 다물어져 있고 어떤 입은 벌려 있고 어떤 입은 이빨이 보인다. 다소 밝지만은 않은 그런 그림을 그린 걸 보니 그때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꾸역꾸역 삼켰던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그 그림과 상관 없는 사람인 척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내 그림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오랫동안 내 그림 앞에 혼자 멈춰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퍽 신경쓰이면서도 궁금해서 옆 그림을 감상하는 척 하면서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자는 나를 약간 의식한듯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어 옆으로 한 두번 정도 흘끔 나를 쳐다 보았다. 얼핏 대학원생 쯤으로 보였다.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 그림 속 여자랑 좀 닮으셨네요."


나는 갑자기 말을 건 이 여자와 상황에 놀라 살짝 얼어 붙었다. 아, 사실 이거 제가 그린건데 자화상은 아니거든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상을 그린 건데 그리다보니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넣었나봐요. 정말 닮아보이나요? 신기하네요. 와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어떤 말도 출력해내지 못했다. 나는 바보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아하핳, 그래요? 라고 간신히 말했을 뿐이다. 여자는 그런 내게 설명하듯 덧붙였다.


"저는 이 그림이 제일 좋아요. 약간 어두운 것 같기도 한데 절망적이지는 않은게…… 이 여자는 귀와 입이 없지만, 눈이 전혀 슬퍼보이지 않고 뒤에 걸린 귀와 입이 많은 게 뭔가 속이 시원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왠지 그건 아주 엄청난 비밀인 것 같아 내가 누설하는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아아,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요."

허허허, 허허. 나는 끝까지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그림을 보는 척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까지도 그 여자는 내 그림 앞에 멈춰 서있었다. 나는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한 동안 이 때 느꼈던 느낌에 잠식되어 있었다.


낯선 여자가 내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눈 앞에서 지켜보는 건 왠지 모르게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비밀을 완전히 들켜 버린 것처럼 조금은 창피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고맙고 뿌듯하고 벅차서 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전시장을 세 바퀴 정도 질주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아무튼 처음 느껴보는 물성의 감정이었다.


내 소설을 읽은 친구가 감상평을 줄줄 읊어댈 때 왠지 귀를 막고 아아아 안들린다, 아무 말도 안들린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아무튼 나는 그림에 대한 태초의 기억이 좋고 아름다워서 그런지,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났을 때 해소되는 감정이 있다는 걸 명백히 깨닫고 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좋아 요즈음도 가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아마 내 평생 취미가 될 것이다.


태초의 감상자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런 짜릿한 감정은 아마 내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거 제가 그렸어요. 라고 대답하고 그 여자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잠깐 상상해보다가도 그냥 그때 그렇게 아무말 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 우연의 일치와 비밀스런 함구가 나는 못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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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