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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Oct 06. 2021

잠옷으로도 입을 수 없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옷장에 처박혀 있는 그것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그것에 대해.

     

헌옷수거함에 넣을까, 생각해봤지만

수거함 바로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걸 다른 누군가가 입고 있는 상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꺼름칙했다.     


진짜 아, 무 감정도 없는데 왜 이런 걸까.

응?     



걸레로 쓸까, 했다.

근데 그것도 적절치 못했다.

그래도 한때 내가 걸쳤었는데,

내 몸에 닿았었는데,

저걸 입고 다녔었는데

그걸로 바닥을 문지를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정말 아, 무렇지도 않은데 왜 이런 걸까.

나, 참.     



낡은 옷을 잠옷으로 입는 걸 좋아한다.

이미 목이 늘어나 버린 순면 100%의 탄탄한 면 소재의 티셔츠를

얼마나 더 늘어날지에 대한 걱정과 조심성 따윈 전혀 없이

마음껏 세탁기에 돌려 빨고, 

양념치킨이나 떡볶이 같은 시뻘건 음식 양념을 흘려대면서도

일말의 죄책감 없이

그렇게 편하게 입는 걸 정말 사무치게 좋아하는데,

왜, 이 옷으론 그럴 수 없는 걸까.     


정말 아, 무것도 아닌데.

왜.     



병신같은 커플 티라고 생각한다.     

기부를 할까, 생각했다.

아니 개뿔 아, 그럴 수 없어.

이런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개인적인 물건으로 착한 일을 할 수 없어.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릴까.

아, 그건 너무 간단해.

간단해서 속이 후련하지가 않다.     

그럼 가위로 갈기갈기 잘라 버릴까, 하다가

자르는 모습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무서워져 그만뒀다.     



정말 병,신, 같은 물건이 되어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단지 천 쪼가리일 뿐인,

빛이 약간 바랜 탓에 

역설적으로 더 보기 좋고 빈티지하게 멋스러워져 버린

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물건에 대해

나는 잠시 또 생각한다.

바닥에 내팽개쳐 놓은 채

한참을 노려본다.     


그러다 그냥 조용히

원래 있던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두고서 속으로 읊조린다.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고작 이딴 물건 하나 아직 처치도 못 하고

이딴,

이,

이,

잠옷으로도 입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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