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정체성의 확립
기자만큼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사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간단하고 사소한 팩트 체크에서부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기 위한 취재까지 전화 없이 기사가 나가는 건, 뇌피셜로 기사를 쓰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루 종일 전화를 걸고 또 받는다.
아침에 발제를 올리고, 보도자료를 쓰고 점심시간에 취재원과 미팅하고,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씨름하다 오후에 기사를 마감한다. 그러면 치열한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있다. 오늘 아무리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도 싹 리셋되고 내일은 또 내일의 기사와 발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자라는 직업은 일의 온오프가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퇴근하고부터 내일을 위한 진짜 일이 시작된다. 다음 날 쓸 기사거리를 찾고, 꼭 필요한 경우 취재원과의 저녁미팅 자리에 참석한다. 본인 출입처에 사건이 터져 급하게 써야 할 기사가 생기면 퇴근 후라도 후딱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주말이라고 예외는 없다. 사실상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쭈욱 ‘일하는 모드’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긴장도가 높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들의 연속. 그런 하루들에 지쳐 갔다. 내가 지쳐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무뎌져 있었다.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다 보니 개인 시간을 보낼 때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파워 E'였던 나는 주말에 조용히 집에서 혼자 책 읽는 시간이 점점 더 좋아졌다.
무한 리셋의 루트 속에서 중심을 잡고 싶었다. 시간이 나를 끌고 가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잡아끌고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라는 사람의 성정으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실이 아닌 글, 팩트로만 채워지지 않은 글에 대한 갈망은 그즈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기사의 성격상 첫째도 팩트, 둘째도 팩트를 추종한다.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소위 ‘야마’라 말하는 기사의 가닥을 잡고 팩트 체크를 통해 확보한 근거를 기사에 버무린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냥 '내 글'을 쓰고 싶었달까.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교 시절보다 더 많은 시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노트북으로 묵직해진 가방에는 언제나 소설책이나 시집이 들어 있었다. 짬 날 때마다 책을 탐독했고, 광화문 교보에 밥먹듯이 드나들었다. 내가 온전히 나로서 '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글은 일기 같은 에세이라고 생각해 그런 글을 열심히 쓰고자 했다. 바쁠수록 더 시간을 내야 된다는 생각에 아예 연재 브런치북을 발행해 일요일에 한 편씩 ‘감성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글인 것 같아도 사람들이 하트를 눌러주면 그게 그렇게 위로와 응원이 되곤 했다.
에세이를 쓰면서 꾸준히 소설 읽는 비중을 늘려가다 보니 나도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노트북에 ‘소설’이라는 폴더를 하나 만들고 짧은 단편 소설이나 아이디어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완성된 것들은 브런치에 옮겨 써두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서랍에 차곡차곡 소설들이 쌓여갔다. 습작하듯 써내려 간 소설이지만 개중에는 책으로 출간한 것도, 브런치 북으로 발행한 것도 있다.
주중에는 기자로, 주말에는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이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작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브런치가 크게 이바지했다. 브런치에 접속하면 나는 언제든 '작가'로 글을 쓸 수 있었으니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은 블로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은 유튜버,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사람은 작가. 브런치가 나를 '작가'로 호명하는 순간 발동되는 그 알량한 호기가 나는 못내 좋았던 것 같다. 자아효능감을 담뿍 느낄 수 있는 순간이랄까.
이상하게 기자로 일할 때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그리워지고,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글을 쓸 때는 '사실'이라는 뼈대라도 있는 글을 쓰는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그리워졌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정체성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두 가지 일 모두 흥미를 잃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기자로서 너무너무 힘들 땐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도피하고, 작가라는 정체성이 은연중에 부담으로 다가올 땐 기자라는 일상으로 도피하면서 그 두 가지 정체성 사이를 진자운동마냥 참 열심히도 오간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도, 말이 안 되더라도 꾸준히 지속하면 어느 순간 그게 말이 되는 순간이 온다고 믿고, 되든 안 되든 글을 발행해 온 것이 지금 돌이켜보니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브런치가 없었다면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실존 감각을 쉽사리 잊고, 그저 시간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힘들고 지치는 순간에도 '나'라는 성정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참 고마운 존재인 셈이다.
그런 브런치가 벌써 10주년이 되었다니. 새삼 놀랍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건 2021년부터라 5년이지만,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브런치와 같이 한 살씩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갈 것 같다. 기자와 작가 사이를 오가든, 다른 그 어떤 직업 사이를 부유하든 '작가'라는 정체성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마음을 울리는 진정한 '작가'가 되는 것이 내 영원한 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