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일을 존재하는 일처럼 만들어 낸 이야기, 그게 소설이라고 배우잖아.
갑자기 그가 말했다.
-‘허구성’이니 ‘개연성’이니 뭐 그런 거, ‘있을법한’ 이야기 어쩌구저쩌구 우리 다 배웠잖아.
-응. 갑자기 그건 왜.
-근데 아닌 거 같아.
-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 일처럼 만들어 내는 게 소설가의 일인 것 같애.
-그런가.
-안 그래?
-결국 두 개 다 비슷한 맥락 아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것도 허구이자 가공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도 허구, 가공이잖아.
-다 거짓말이란 거네.
-응? 그게 그렇게 되나.
-소설은 기본적으로 다 거짓말이라는 거잖아.
-‘허구의 이야기’를 ‘거짓말’이란 워딩으로 치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너 편할 대로.
-다 거짓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소설가는 슬퍼.
-왜 이래.
-거짓을 팔아야 하잖아.
-오늘 감성 수치 혈중과다야 너.
-거짓을 파는 일이란 슬퍼.
-술 마셨니?
-아니, 차라리 취한 거면 좋겠어. 그럼 좀 덜 슬플 것 같은데.
-소설은 누군가에겐 위로고, 삶의 확장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이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기만 할 필요는 없어.
-그럼 뭐 해. 다 거짓인데. 위로도 공감도 다 거짓이야.
-오늘 너무 어린애같이 구네.
-소설가는 힘들거야.
-어휴.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거짓을 창작해 내야 하니까 정말 힘들 거야.
-그래그래.
-거짓말쟁이로 살아가야 하니까.
-그러게.
건성으로 대답하고 치웠는데 그는 정말 슬퍼 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속으로 왜 저래, 병이 있나?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정말 슬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때?
-어떻게.
-세상 모든 것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려.
-전부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란 말이야?
-음, 거짓이라기보다 내가 모르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아는 게, 내가 보고 느끼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틈을 조금 남겨두고 열어두는 태도로. 그럼 좀 편해지지 않아? 덜 슬퍼지고.
그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소설가의 소설도 어떤 건 진실이고 어떤 건 허구인거야. 인물이든 대사든 상황이든 그 요소 중 어느 작은 것 하나쯤은 현실의 것을 차용했을 거야. 100% 허구, 100% 진실, 실화만으로 된 소설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떤 말은 진심이고 어떤 말은 거짓말이듯이. 한 문장 안에서도 어떤 표현은 진짜고 어떤 표현은 과장되거나 거짓일 수도 있다고. 그냥 모든 걸 그렇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봐.
그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는 거짓말쟁이인 것도 아니고,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네.
눈이 반짝였다.
-모든 슬픔이 사라졌어.
너무도 천진한 목소리로 마치 감탄하듯 내뱉어서 나는 웃음이 날 뻔했다. 골 때리는 자식이구만.
-다행이다. 슬픔이 사라졌다니.
일순간에 사라진 슬픔, 그것도 ‘모든 슬픔’이 사라지다니. 내가 무슨 마법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슬픔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그건 슬픔일수도 아닐수도 있기 때문에 완전한 슬픔은 사라진거야. 모든 슬픔은 결국 오로지 슬픔만은 아닌거야.
슬픔이 사라진 게 아니라, 슬픔이라고 부르던 감정의 실체를 부를 ‘말’이 사라진 거나 다름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쫑알쫑알 대면서 자위하는 그가 제법 귀여웠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왜 웃어?
아, 귀엽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게 미소라도 머금고 있었나보다. 나는 정말 감정을 꽁꽁 숨기는 데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안 웃었는데.
-참나, 지금도 웃고 있으면서.
입을 삐죽거리는 그를 보면서 언젠가 이 장면을 소설에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소설에서는 좀 덜 귀엽게 묘사해야지.
너무 귀여우면 안 되니까, 뭐 그런 생각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