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상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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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짜 아플 때는 병가를 쓸 수 없는 걸까.
아픈 배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밤새 흘린 식은땀에 내 몸뚱이 모양 그대로 이불이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오후에 미팅이 있다. 부장이 반려한 기획안도 이번 주 내로 끝내야 한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 아픈데 먹고살겠다고 회사에 가야 하나. 괜히 서글퍼진다.
물론, 피곤할 때 (거의 매일이지만) 반쯤은 꾀병을 부려 병가를 내고 회사에 가기 싫다고 생각한 날은 많다. 「팀장님, 제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가를…」를 몇 번이고 적었다 지웠다 반복한 꾀부리던 날도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천 직전까지만 가고, 이내 늘 곡소리를 내며 회사에 가긴 했단 말이다.
서른셋의 나는 완전한 신입사원도 아니지만, 여전히 회사의 피라미드에서는 최하위라 적당히 아픈 정도로는 병가를 쓰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픈데도 못 쉴 줄 알았다면, 몸이 조금 안 좋을 때 반쯤 꾀병으로라도 쉴걸.
몸이 조금 피곤한 수준일 때는 병가를 쓸 수는 있는데 양심상 안 쓰게 되는데, 왜 정작 너무나 아플 때는 늘 일이 많아서 쉴 수가 없는 걸까. 아닌가, 그 정도로 일이 많으니까 몸이 못 버티고 축나버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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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가며 굳어진 만성 위염은 피곤과 스트레스가 축적된다 싶으면 크게 터져 버리곤 했다. 며칠 전부터 그 전조증상이 나타났다. 위가 팽창하면서 배의 윗부분이 아래보다 더 불룩하게 솟아 연신 트림이 나오고, 식은땀이 흘렀다. 배가 무거워 자꾸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어제부터는 온몸이 부어 발가락까지 푸르스름한 보라색 빛을 띠며 퉁퉁해졌다.
이대로는 정말 큰 일 날 것 같은데, 병가 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쉴 수가 없어!
그렇게 정말 빵, 터지기 일보 직전에 기적같이 추석 연휴가 땅, 시작된 것이다.
살았다. 송편이고 전이고 나에게 이번 명절 연휴는 ‘요양 기간’이라고 선포했다. 고맙게도 가족들도 나를 배려해 주어서 일도 시키지 않고, 스트레스도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주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명절 기름은커녕, 최소한으로 먹을 것을 제한했다. 계란과 순두부같이 훌훌 넘어가는 음식을 몇 숟갈 먹는 게 전부였다. 혈액 순환이 잘 되라고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했다. 남는 시간은 누워서 자거나, 눈을 뜨고 누워 있거나, 책을 읽으며 반쯤 누워 있는 게 전부였다. 반인 반바닥으로 보내는 명절 연휴. 신기하게 사람이 누워만 있어도 시간은 참 잘 간다.
나는 누워서 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이렇게 쉴 때 아파서 너무 다행이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직장에서 부푼 배를 부여잡고 자본주의의 미소를 짓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니까. 너무 다행이다. 이렇게 아픈데 쉬는 날이라.
그런데 친구의 답장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야… 그 말이 더 슬퍼ㅠㅠ」
친구는 분홍 토끼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어, 그런가. 그렇네. 이거 생각해 보니 슬픈 일이기도 하네.
명절 연휴라서 며칠을 연달아 쉴 수 있는 때에 아픈 걸 너무 당연히 다행스럽게 여겼다. 추석 연휴는 민족 명절의 의미보다는 합법적으로 회사에 안 가도 되는 날, 상사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아파도 괜찮은 날이었다.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서 자음 ‘ㅋ’을 연달아 써서 답장했다. 약간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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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역시 다시 생각해도 이렇게 쉬는 날 아파서 다행이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아파도 괜찮은 날 같은 게 어디 있겠는가마는, 있다. 마음껏 아파도 괜찮다는 말도 이상하다마는 역시 존재한다.
서른셋. 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완전한 신입이거나 사회 초년생도 아니라서, 내게 전담된 일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적당히 아픈 정도로 병가를 쓰기에는 눈치가 보이는 말단이다. (뭐, 내 어중간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발가락의 부기를 빼기 위해 몸쪽으로 쭉 당기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낮잠을 한숨 자야겠다. 명절 연휴니까 그래도 된다.
이렇게 쉬는 날 아파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