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펜, 사용하기 가장 만만한 녀석

by 어찌


어느새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마침표의 시간이 올 것이다.

펜에 담긴 잉크의 정해진 시간은 정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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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첫날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정석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있다.


- 고민되면 첫날은 그냥 모나미 룩으로 입어.


모나미룩. 흰 셔츠에 검정 하의. 흰 펜대에 까만 펜촉을 가진 모나미 볼펜에서 따온 명칭의 스타일이다.

이처럼 가장 무난한 스타일의 근본답게 '모나미 펜'은 학창 시절 가장 무난하게 사용하던 필기구였다. 가격도 저렴하고, 국민 펜답게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가장 만만한 녀석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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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건을 다 쓴' 경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모나미 펜이 등장한다. 고3, S대학 합격생이 하루에 모나미 볼펜 하나를 다 쓸 때까지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수학 100점을 맞는다든가, 하루에 영어단어 100개씩 외운다는 건 불가능했지만 하루에 펜 하나를 다 쓰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학생에게 펜은 어차피 계속 쓸 물건인지라 혹시라도 실패해도 다음 날 이어서 쓰면 됐다. 실패 비용도 적다.

도서관 지하 매점에서 모나미 펜 5개에 1,000원짜리 한 묶음을 사서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았다. 딸깍- 펜의 끝을 누르자 검정 대 사이로 둥그스름한 금속의 촉이 나온다. 종이에 문질러 잉크 똥을 한 번 닦아주고 쓰기 시작했다. 수학 문제였나, 영어 단어 깜지였나, 한국사 연도표였나. 푸른 기가 살짝 섞인 금속물 같던 검정 잉크를 종이에 담았다.


그래서 대입이라는 목표 달성에 성공했느냐면... 성공은커녕 수능을 제대로 말아먹고 말았다. 매일 펜 하나를 다 쓰는 것도 첫 며칠 정도는 성공하는 듯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모두 써서 하려니, 이미 미루고 미루다 수능 날에 맞춰 급하게 계획했던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엄청난 성과나 목표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단숨에 달성하는 기적이 펜 끝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인생에 '물건을 끝까지 다 써서 마무리를 지어 본 경험'으로 남아있다. 위안을 삼자면, 하루 안에 하나를 다 쓰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며칠에 걸쳐서는 성공했다. 적어도 그 플라스틱 펜대를 그냥 버리지는 않았다. 잉크가 더 나오지 않고 종이에 펜으로 눌러진 자국만 남는 순간은 마침표가 되었다. 이전 장들을 넘기면 그동안 무언가를 해 온 증거가 잉크를 따라 담겨있었다. 정직하게 남아있는 가시적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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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억과 함께, 집에서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 물건이 펜이라는 점, 그리고 실패 비용이 거의 없어 만만하다는 점에서 사용라이프의 첫 목표는 '있는 펜을 하나씩 다 쓰자.'가 되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펜을 한데 모아 색깔별로 정리하며 생각했다. 더는 펜으로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고, 요즘의 문자는 거의 디지털화되어 텍스트로 입출력하는데 이 많은 펜을 어디에 쓸까. 일단 지금 하고 있는 필사에 쓰면 되겠다.

역시나 매일 필사를 한다고 작문 실력이 크게 는다든가, 몰아치는 흡입력의 천재 작가가 되진 못했다. 하지만 잉크가 종이에 사각사각 담기는 순간은 시간이 멈춘 채로, 나 혼자 흐르는 편안함을 주었다. 어차피 이제는 학창 시절처럼 'S대학 합격'이라는 최종 목표도 없다. 하루에 꼭 하나의 펜을 다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이미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 쓰는 것으로 충분하다. 적고 싶어지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 쓰고 싶은 만큼의 잉크의 시간 동안만 쓰다 보면 어느새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마침표의 시간이 올 것이다. 펜에 담긴 잉크의 정해진 시간은 정직하니까.

펜을 쓴다. 종이와 내 시간에 잉크의 질감이 입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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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회사에 모나미 룩 대신 편한 청바지에 깔끔한 티셔츠나 블라우스를 입고 다닌다. 모나미룩은 면접을 볼 때 정도만 입는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 모나미 펜을 쓰지 않는다.

다이어리를 꾸민다며 샀던 가격대가 있는 펜들부터, 어디서 받은 지도 모를 (주)○○회사, □□박람회, △△공사 같은 문구가 쓰인 홍보용 펜들까지 많기도 하다.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에는 비싼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쓰기도 하고, '오늘은 어떤 회사에 입사해 볼까'라며 △△공사나 회사의 펜을 쓰기도 한다.


지나 온 시간 동안, 펜이란 놈도 그 작고 얇은 물성 안에서 바지런히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더는 잉크 똥 닦을 일이 많지 않다. 어떤 펜에는 '저중심', '초저점도'와 같이 묘하게 엄청난 기술이 들어간 4차 혁명 결과물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듯한 문구가 박혀있기도 하다. 모나미 펜도 더는 '모나미룩'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다양한 종류가 나온다.

그럼에도 결국 펜이라는 놈은 ai니 하는 최신 기술에 밀려 '아날로그 감성'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비운의 물건이다. 어쩌면 나는 그 운명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대하고 정신없이 빠른 최첨단의 세상 속에서, 저 홀로 작은 무언가를 꾸준히 해 나가는 녀석이라는 게. 덕분에 여전히 만만해서 부담 없이 쓰고, 또 다 쓰고 나면 가볍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시험 백 점이나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보다, 무작정 하루에 펜 하나씩 쓰기 정도의 실현 가능한 꿈을 꾸게 해 주었듯이, 펜을 쓴다는 것은 커다란 목표 따위가 아니어도 그냥 하루에 작은 무언가를 남길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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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펜이란 놈은 쓰는 건 가장 만만하지만, '다' 쓰는 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만만히 보고 시작했다가 내가 만만이가 되어버렸달까. 펜의 기술 발전은 내 상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정말이지 요즘 펜들은 엄청나게 닳지를 않는다. 몇 개월 동안 필사 노트 몇 권을 다 쓸 즈음에야, 0.7mm의 펜 하나가 마침표를 찍었다.

가지고 있는 펜을 다 쓰려면 평생 쓰겠는데?

수능을 망쳤다지만, 이 정도 계산 정도는 할 수 있다. 찍어야 할 마침표가 많다. 평생 찍다 보면 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