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Judo-Girl > 유도를 하게 된 이유
나는 유도를 한다.
사람이나 물건을 목적한 장소나 방향으로 이끄는 '유도하다'의 유도(誘導)가 아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볼 수 있는, 두 명의 선수가 도복을 입고 하는 스포츠, 그 유도(柔道)를 한다.
내가 유도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되묻는다.
"유도요?"
그러면 나는 되짚어 대답한다.
"네, 유도요."
키도 작고 메치기에 능하게 생기지도 않은(?) 여자애가 유도를 한다고 해서 되묻는 건지, 유도라는 운동이 가진 낯섦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유도하는 나'를 꽤나 흥미로워한다. 그리고 나는 '유도'가 흥미롭다.
유도의 매력에 빠진 이유를 설명하려면, 14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때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수영, 역도 등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의 멋진 활약을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하던 그때, 나는 최민호 선수의 유도 경기를 보게 됐다.
작은 체구의 최민호 선수가 상대 선수를 넘어뜨리고 무너뜨리고.. 다른 무기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을 무기 삼아 경기를 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사실 그로부터 4년 전, 2004 아테네 올림픽 때에도 이원희 선수와 최민호 선수의 경기를 정말 재밌게 봤는데. 4년 만에 유도 경기를 보며 또다시 엄청난 희열을 느낀 나는, 그렇게 유도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어른이 되면 꼭 유도해야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됐지만, 주변에 유도를 배울 수 있는 유도 도장은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거리에 도장이 하나 있었지만, 앞서 가본 친구가 그 도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며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운동은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쾌활하고 밝은 분위기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운동에 대한 나의 신념이기 때문에 신념을 포기할 수 없던 나는 잠시 운명을 미뤄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러 집 근처에 주짓수 도장이 생겼고, 나는 유도 대신 유도의 아들 격인 주짓수를 배워보기로 했다. 검은색 주짓수 도복을 입고 처음 거울 앞에 섰을 때, 가슴이 뛰었다. 거기에 '여자가 남자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는 주짓수 앞에 붙는 수식어도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다른 무기 없이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 그것이 주짓수의 매력이었고, 유도의 매력이었다.
유도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누굴 메치려고 유도를 배우냐고, 누굴 꺾으려고 주짓수를 배우냐고.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어떻게 하기 위해 유도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내 정신을 지키기 위해 유도를 했고, 지금은 그냥 유도가 재밌어서 하고 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런 옛말이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호랑이 굴 입구에 서는 순간부터 정신줄을 놓아버릴 사람이다. 겁이 너무 많아서 호랑이 굴 입구에 서자마자 멘붕 오고 벌벌 떨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쫄보다. 이렇게 겁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를 향해, 내 친구는 언제가 쫄보를 넘어 "쭈다리"란 세상에 없는 단어로 나를 불렀다. 그 '쭈다리'인 내가 호랑이 굴에서 제대로 빠져나오려면 정신을 붙잡고 있을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나는 유도를 택했다. 유도를 하며 쌓이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내 정신을 바로 잡아줄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굴에서 비록 내가 호랑이와 싸워 이길 순 없어도 지금처럼 정신만 차리면 빠져나갈 기회는 반드시 올 테니까. 정신을 붙잡고 기다리면 언젠가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생각보다 세상엔 호랑이 굴이 참 많다. 어두운 밤길의 위험한 상황도 호랑이 굴이 될 수 있지만, 일상에서도 우린 호랑이 굴을 참 많이 만난다. 힘을, 나이를, 직위를, 돈을 무기 삼아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오는 사람들. 그건 유달리 '내 키가 작아서', '여자라서', '나이가 어려서', '가진 게 없어서'가 아니다. 사회를 살다 보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나이가 적거나, 직위가 낮거나, 돈이 부족한.. 상대적인 결점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평범'의 범주에 속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다수의 편에만 속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극히 평범했던 내가 소수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늘 을중의 을인 줄만 알았던 내가 호랑이 굴의 주인인 갑, '호랑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매일매일 모든 것이 바뀌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다?
바로 정신이다. 그리고 그 정신을 잡기 위해, 멘탈이 부서지지 않기 위해. 혹 멘탈이 부서지더라고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유도를 한다.
14년 전 오로지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상대를 무너뜨렸던 최민호의 유도 경기처럼, 멋지게 승리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유도로 내 몸과 마음을 단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