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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n 28. 2023

슬픔의 현장에 있는 어린이

이대일의 동시 <나비>를 읽고

나비

       이대일     

엄마는

곧, 나비가 된대요     


엄마는 스스로 실을 낼 수 없어

장례사 아줌마 아저씨 두 분이

도와주고 있어요     


아빠 이모 이모부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어요     


고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어요     


한 밤, 두 밤, 세 밤······ 지나면     


하느님이 주신 하늘하늘 날개옷을 입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살짝이 하늘나라로 날아간대요     


엄마, 잘 가 안녕

아빠는 내가 지킬게······


출처,《동시마중 71호》


 시의 화자인 아이는 엄마의 죽음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죽음 앞에 있는 것이 아이이기에 더욱 슬프다. 그런데 엄마를 보내는 아이는 너무나 차분하다. 이런 아이가 있을까?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아빠는 내가 지킬게”라고 말하는 인물은 비극적 연출을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고 시를 반복하여 읽었다. 그러나 시는 여전히 울림이 있었고, 아이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아마도 아이는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던 것 같다.

 아이는 덤덤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온 힘으로 버티고 있다. 시선이 고정되어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는 한 자리에서 두 발을 딱 붙이고 꼼짝하지 않는다. 2~4연은 염습(殮襲)의 과정인데, 아이는 엄마가 염포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장면을 응시한다.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고개 돌리지 않고 엄마의 죽음을 맞대하는 아이에서 상황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아이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은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엄마, 잘 가 안녕/ 아빠는 내가 지킬게······”라고 하며, 떠나간 엄마보다 살아 있는 아빠를 생각한다. 엄마 없는 자신보다 아내 없는 아빠를 걱정하는 마음이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말하게 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이와 함께 있는 가족은 “아빠 이모 이모부들”이다. 아이는 이모와 이모부들 사이에 홀로 된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다. 아빠는 알고 있을까. 엄마의 죽음에도 아이가 울지 못하는 이유를.

 아빠를 걱정하는 아이를 보면 측은하고,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다. 슬픔을 참으면 마음이 썩기 마련인데, 아이는 언제쯤 슬픔과 정직한 대면을 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아이에게 온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도 어른의 눈치를 보느라, 어른을 걱정하느라 자신의 슬픔을 애써 부정하는 어린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고 현장에서 어린이를 먼저 구조해야 하는 것처럼, 슬픔의 현장에서도 어린이는 가장 먼저 보살펴져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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