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책기록

by 물결


인천 반달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p.14~15.


내가 있는 곳의 소리와 그 사람이 행하는 일의 소리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 것. 나는 보고픈 사람을 떠올릴 때, 어떤 연유로도 볼 수가 없는 얼굴을 떠올릴 때. 다른 생명의 온갖 형상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웃음소리가 닮은 것 같아. 사람을 비라보는 시선이 닮은 것 같아. 배시시 웃음 짓는 얼굴이 닮은 것 같아. 손가락 마디마디가 닮은 것 같아. 꽃을 좋아하는 것이 닮은 것 같아. 시랑하는 이와 아주 닮은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아니 아주 조금 비스듬히 닮은 사람을 만날 때조차 나는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p.22~23.


내가 배운 사회학은 때로 척박하고 황폐한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학문이다. 내가 배운 사회학은 타인을 오래 생각하여 눈동자의 맺음새에 맺힌 그 그렁그렁한 눈물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린 그 눈물을 주관적으로 이입할 수 밖에 없다는 가정을 전제하에, 그 눈물의 밑변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아주 객관적으로 세상에 알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사회학이 퍽 깊이 좋아지곤 한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p.25.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햇빛이 먼저 와 들고, 그 이의 얼굴을 만진다면 나는 햇빛을 만질 수 있다. 강물이 비치면 나는 강물을 만질 수 있고, 얼굴에 피곤이 비친다면 쓰다듬어 그 피곤을 가시게 할 수 있다. 햇빛이 드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매만지는 것은 고운 마음씨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햇빛을 어루만지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얼굴을 만지는 것과 동일어이다.



호우주의보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뀌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p.44~45.


흔들리는 마음에게서 빌려온 것들을 보자. 내 모든 것은 흔들리는 마음에 근거하여 펼쳐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신비해하는 것, 내가 꿈과 이상으로 품은 것은 모두 나의 흔들리는 마음에 단단히 연결되어 기초한다. 새초롬하거나 가냘프지 않은 것, 흔들리지 않은 것은 나에게 여운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마음들에 빌려온 것들에 기초하여 나의 생과 삶을 펼쳐나가는 일이 즐겁다. 이것은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군가에게도 갚아야 할 것이다.



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가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p.49.


끝물, 끝의 모습은 어떤 이들을 위로한다. 그들은 모두 마지막에서 헛헛하게 누군가를 위하는 방법을 안다.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통하여 길을 외우는 이들의 모습. 가난을 위로하는 끝물의 과일들. 마지막의 모습은 이래야만 한다. 잔잔히, 가감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형형히 떠나야 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은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p.55.


비는 곰팡이를 자라게 한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지하 주차장의 곰팡이 냄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고, 온 몸이 힘들어졌다고 했다. 나는 곰팡이 냄새를 몹시 좋아한다. 나는 이유도 모른채 이유도 모른채 곰팡이 냄새를 찾는다. 곰팡이는 어둠, 습한 장소, 깜깜한 곳을 근거지로 자신의 영역을 촘촘하게 펼쳐나간다. 나는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면 가슴의 숨을 학의 날개처럼 활짝 펴서 깊이 들어마신다. 나는 엄마의 모든 고생과 윤택함을 수혈받아 어른으로 컸다. 나는 사람과 자연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전달받아, 평생을 살아간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간다. 모두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나날이다.



박준, 문학동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2017.

2022年 10月 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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