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따뜻한 나의 집, 구석구석 고요함 깃들고 복작복작 소리가 모여드는 곳. 저녁이면 가냘픈 아빠는 제가 좋아하는 신문 속 구절을 오려 와, “읽어보렴” 말하며 손에 쥐여 줍니다. 읽은 신문지 계속 모아온 아빠는 가족이 살아가며 만드는 물질적 그을음을 메우기 위해 새벽부터 바깥에서 해의 빛 받아 달그락- 달그락- 움직이고 있습니다. 해의 ‘빛’ 받아 항상 일찍이 움직인다면 은행의 ‘빚’을 채울 수 있다는 것도 옛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만, 부모님은 재활용하고 아끼었던 가난의 습관이 온몸 깊숙이 배여 있는 옛사람입니다.
애정 깃든 반찬처럼 편식하기 쉬운 우리의 환경에선 제멋대로 정보를 조합하거나,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거나, 이득과 손실대로 움직이거나,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쉽지만 오래토록 내려오는 옛 선인들의 자취와 품위는 사방팔방 날뛰지 않고 고귀합니다. 그 향기는 은은합니다. 그리하여 요즈음 제 읽기의 시작은 배우고픈 ‘아빠의 신문’에서 출발하여, 여러 늪과 웅덩이의 물음들로 뻗어가곤 합니다.
현실의 정해진 늪에 가까워지면 우린 그것에 압도당하곤 해요. 물론, 몰려가는 것을 탓하는 것은 그들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이를 향해 모모처럼 “왜 그리 살아야 하나요?” 물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계에 순종해 사는 것, 돈에 죽고 사는 상황에 다다르기 쉽다는 것을 느끼며, 모든 이를 안아주고픈 마음이 생겨나고 있어요. 몹시 황급하게 되면 늪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현실만 다가오는 법이니깐 늪의 물을 먹는 나무, 이파리 안의 어여쁜 생물, 생물 위의 하늘을 돌아볼 생의 여유는 사라집니다. 없는 자보다 가진 자들의 선택은 더 너그러워지기 수월합니다. 배부른 이가 더 선하기 쉬운 형태의 세상입니다. 저는 그저 이러다가 나만을 위해 돈을 벌고, 홀로 성공하기 위해서만 살아지지 않았으면 해요.
비도덕적인 것, 거짓된 것은 우리를 마모한다고 느껴요. 그것은 결림이 없도록 하여, 바닷가 모래알처럼 손에서 부질없이 스르르 사라져 버려요. 우린 옳은 것을 더 민감하고 여리게 느끼고 파악하기 위해 매일을 공부하고 있어요. 읽고 있다는 것은 아빠가 가져온 신문을 말하기도, 지금 펼쳐진 메리 올리버의 시책을 말하기도, 2개월마다 오는 『녹색평론』을 말하기도, 스쳐 가는 사람들을 말하기도,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말하기도, 잔잔한 하루를 말하기도 합니다. 읽던 도중, 그 이의 웅덩이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면 흐르는 눈물은 모두의 마음결을 타고 와, 발밑의 창공에 드넓은 웅덩이를 만듭니다. 모두가 각자의 발밑에 푸르게 빛나는 웅덩이를 달고 걷습니다. 우리 함께 그 웅덩이를 보아요. 이곳에서 손이 닿지 않지만 쓰러지고 있는 미얀마의 청년을 기억하고, 엄마를 보고 싶어 슬퍼하는 아이를 위해 움직이고 싶어요.
"깊은 웅덩이를 보는 세상의 뼈살이꽃, 살살이꽃, 숨살이꽃이 될게요. 가장 아래, 고통의 진흙밭 가까이 있는 당신의 물을 들려주세요. 두레박으로 올린 실타래 삶을 우리에게 적셔주세요. 우리의 웅덩이를 함께 이어요."
읽고 있으면 투박한 것을 투박하게, 잘못된 것을 잘못되게, 옳은 것을 옳게 볼 수 있는 시선이 돋아납니다. 우린 계속 읽어나가며 불의에 결림을 느끼도록 민감해지고, 끝없이 정의로운 것을 선택하도록 노력해야 해요. 『행복한 왕자』처럼 강인해져 고통스러워하는 이를 보며 용기 낼 때 우리는 비로소 단단해집니다.
읽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는 장소는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의 한 책당 한 명의 작가가 썼다고 본다면, 이곳은 얼마나 많은 작가의 혼이 산재해 있는 곳인가요.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롭게 책상에 있어 준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도서관은 오늘도 고요합니다. 펼치면 나오는 이곳은 짙은 노고, 이슬 같은 눈물, 웅덩이 같은 슬픔, 웃음들이 서리어 있는 곳. 죽은 이와 산 이가 만나 악수하고 교감하는 곳입니다. 그 무수한 마법서를 읽고 많은 이들이 세상에 아름다운 정의를 읊조리기를, 실천하기를, 행동하기를. 옳은 숨결을 내쉬어주시기 바랍니다. 은은히 발화하길 바랍니다.
2021年 5月 1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