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사상 시간에
치열했던 3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이청준의 중단편 소설모음집이였는데, 작품은 대체로 문명사회의 이면을 조명하고, 현대인이 겪는 아픔들을 해괴하리만치 선명하게 그려냈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작품은 ‘가학성 훈련’이라는 작품이다. 돈이 없어 주인집의 방 한 칸을 빌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한 가족의 삶을 가장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포인트는 이 가족의 비극적인 가난이 아니었다. 주인집 아기가 울 때면, 셋방에 사는 주인공의 아기는 안방으로 불려가다시피 들어갔다. 명목상으로는 ‘달래주기’였으나, 주인공의 아기는 안방에서 주인집 아기에게 머리채를 잡혀주어야만 했다.
작가는 인간의 ‘굴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어린 소를 길들이기 위해 고삐를 쥐고 훈련하듯이, 그 어린 아기에게도 태어날 때부터 그 아기의 삶을 이끌고 가버리는 ‘굴레’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아기에게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주고는, 억지로 뜯김을 당하면서도 절규하듯 더 세게 뜯으라며 소리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 소설을 읽고 한 동안은 마음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늘 정면에서 보기를 꺼려했던 삶이란 범인을 처음으로 마주 본 느낌이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내 최대의 고민은 ‘나의 굴레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은 후차적인 문제고, 먼저 나는 나의 굴레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나의 굴레를 찾기 위해서 나는 우선, 그동안 나를 편리하게 해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자는 착하고 부자는 악하다.’식의 세상을 정확히 둘로 쪼개어버리는 이분법은, 그동안 나로 하여금 대중에 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 안정감에 속아 평생 나를 가둔 굴레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수 없었다. 나는 굴레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내 굴레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단순히 굴레의 유무 따위나 판별할 수 있는 이분법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늘 순종했던 이분법의 신에게 불순종을 선포한 후 나는 우연히 알랭 바디우라는 한 프랑스 철학자의 ‘배반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진리사건이 도래하면 이전까지의 삶을 배반해야한다고 말했다. 만약 이전까지의 삶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새롭게 도래한 진리사건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어느 쪽으로든 배반을 할 수 밖에 없는 ‘배반의 철학’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분법을 배반한 한 번의 배반전적(?)이 있던 나로서는 이제 배반이 두렵지 않았다. 알랭바디우의 배반의 철학을 접한 후로는 오히려 나의 배반력(?)에 추진력을 얻은 듯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내가 내 스스로에게, 나의 굴레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또 다른 ‘배반’은 감각의 배반이다. 나는 약 20년의 시간동안 신앙을 통해 내 감각의 유한성과 휘발성을 익히 경험해왔다. 하늘을 내 시야에서 가린다고 없는 것이 아닌데, 나는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내 온 이성과 양심이 변증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애써왔었다. 나는 나의 시각, 청각, 촉각에 대한 배반을 그토록 망설였었다. 하늘은 내가 그것의 존재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혹은 내가 하늘로부터 어떠한 이득을 얻든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든지와 상관없이 그저 존재한다. tv에서만 보는 연예인들을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허상으로 치부해버린다면, tv밖의 대중은 모두 동시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지만 내가 자꾸 그 답을 부정하려 했던 이유는, 감각을 배반한다는 것은 앞으로 더 어려운 삶을 개척해가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들을 믿는 것에는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면 뼈를 깎는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그만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 표현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나를 옭아맨 굴레를 찾아내기 위해, 나는 나의 감각을 배반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믿음을 배반하며, 내게 이득을 주는 것들의 존재만 승인하고, 내게 때론 고통을 주는 신의 존재와 인격신의 사랑을 부정해온 나의 이기적인 이성에 배반을 선포하는 바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윤리와 사상 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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