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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아 Nov 17. 2023

이분법적 사고

행복 아니면 불행

저녁은 늘 같은 루틴있다.      

퇴근 후 씻고 나면 아들과 놀아준다.

그러고는 허기진 배를 순식간에 채우고 다시 아들과 한바탕 놀고, 아내가 아이를 씻기는 틈에 쉬거나 방청소를 하고 다시 아들이 나오면 영어공부 혹은 미술수업을 하고 잠깐 휴식시간을 갖고 방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한다.      


몸과 정신이 덜 피곤하면 아들을 재우고 아내와 시간을 보낸다.

함께 이야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있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도 있다.     


눈 뜨는 시간부터 눈을 감는 시간까지

난 부단히 잘하려고 노력을 하면 24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꿈속에서도 무언가를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루틴 속에 잠시 일탈이 계획되었다.


오랜만에 후배와 약속을 잡았다.

그것도 황금 같은 저녁시간에 말이다.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한 시간의 자유시간 참으로 유익했다.

약속 시간이 정해지고 나서는 마음속에 벼르고 있던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만나기로 한 후배는 정신과 쪽에서 일을 하고 있다.

최근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봤다.

배우 박보영은 여전히 예뻤고 드라마도 내용도 참으로 새로웠다.



드라마를 너무 재미나게 보고 나서 난 내 정신상태에서도 너무 궁금한 것이 생겼다.

두 남자는 한가로운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인생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이 키우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직장이야기

이야기가 오가던 중 나는 준비해 둔 질문을 수줍게 해 보았다.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굉장히 우울해져.”

“아무 일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전제가 붙는다는 것도 빼먹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 우울감은 아주 가끔이며 우울감도 다음날이면 사라진다고 말이다.

혹시 내가 우울증으로 넘어가는 초기 증상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같이 긍정적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울증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 며칠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후배는 안심하라는 듯이 내 질문에 답변을 이어간다.    

 

“형 그 정도는 누구나 있을 수 있어요. 안심하고 운동을 좀 해보세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는데 별일 아니라는 후배 반응에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뭐든 너무 잘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아무도 바라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이 두 문장이 늘 나를 누르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감투가 적은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감투를 늘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동생에게 물었다.     


“수많은 감투들을 다 잘하고 싶어 그리고 잘했다는 결과를 만들고 인정받고 싶은가 봐.”

“좋은 아빠.”

“좋은 남편.”

“글을 잘 쓰는 작가.”

“가족에게는 좋은 아들이자 좋은 막내 동생.”

“그리고 하는 일까지 성공을 거두는 사람.”     


내 말에 다시 한번 동생은 답을 해주었다.  

   

“감투를 만들어준 것도 행복한 상황이 아닐까요?”     


누군가는 감투를 쓰고 싶어도 능력이 되지 않거나,

주어진 상황이 그렇지 못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적어도 남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나는 감투를 감당하면서 지켜내고 있다.

가끔 버겁기도 하지만 감당하는 자체가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행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잘해야겠다’라는 내면과 ‘내려두고 싶다’라는 내면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나 보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 번씩 나에게 무력감이라는 전쟁 후유증으로 남는 게 아닐까?


나름 세상을 넓게 보려고 했는데 정작 내 마음은 좁디좁은 두 갈래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잘하거나 혹은 못하거나 이게 정답이 아닌데 꼭 정답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고는 쉽게 보이지 않는 정답에 애타하면서 스스로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이런 내 성격이 나를 움켜쥐고는 힘들게 했던 거 같다.      

아마도 나보다 더 많은 이들이 단 하나의 감투이든 많은 감투이든 잘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잘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되시니까 충분히 그 일들을 감당하시는 거 같아요.”

“못하면 어때요?.”

“좀 쉬었다가 시작하셔도 돼요.”     


사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들이기도 하다.

제법 인생을 알아가는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후배한테 한 수 배웠다.

난 아직 무르익기는 한참 멀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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