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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아 Dec 04. 2023

죽음에 관한 개똥철학.

부고(訃告) 문자를 받고.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린다.

일을 하고 있는 터라 벨소리 잠재울 생각은 잠시 미루고 하던 일에 집중을 한다.

한숨 돌려보자 하고 주섬주섬 핸드폰을 챙겨 들어 본다.     


'어디 보자 누구한테 전화가 왔나.'     


통화목록을 보니 전화의 주인공은 친구 녀석이다.

'어쩐 일로 전화를 했지?' 짧은 생각을 마치고 카톡을 보니 부고가 도착해 있다.     

내용을 보니 중학교 동창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했단다.

요즘에는 부고를 이용한 보이스 피싱이 유행이라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장례식장에 갈 약속 시간을 정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30대가 된 게 엊그제 같다.

벌써 8년,

조금 있으면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시간이라는 녀석은 형체가 없지만,

나의 삶과 몸에 형체를 씌워서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듯하다.  

   

늙어가는 얼굴.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조금씩 유행에 무뎌지는 감각.

잘 아물지 않는 상처.

그리고

결혼 소식, 돌잔치 소식

이제는 친구부모님의 장례소식.   

  

몇 년 전만에도 결혼소식에 축의금을 챙기기 바빴고,

그 친구들이 하나둘 아이를 낳아 돌잔치에 참석하기 바빴다.

물론 나도 같은 과정을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는

슬픔을 함께 해야 한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게 실감이 된다.

난 아직 부모님 두 분 모두 살아계시지만,

곧 반대의 입장이 되어 나도 누군가에게 슬픔을 함께 해달라는 소식을 전할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불효자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30대 40대가 그런 나이인가 보다.

탄생을 축하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나이

환희와 슬픔이 공존하는 나이가 아닌가 싶다.    

 

그 이상의 나이가 되면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도 하나씩 사라지고

나 또한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생이 허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젠장. 그만 나이를 먹고 싶다.'   

  

철없는 생각을 해 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1초 전은 과거가 되고,

글자 타이핑 하나하나 쓸 때마다 시간은 흐르고 있다.  

   

6살 아들의 하루와 38살인 나의 하루는 얼마만큼의 속도  차이가 있을까?

38살이 나의 하루와 80세 노인의 하루는

얼마만큼의 속도 차이가 있을까?

누구에게 이 질문을 해야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부고(訃告)로 인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노인들이 내 생각과 내 글을 보면      


"허허허 젊은이가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구먼."     


이라며 핀잔을 줄 수 있을 거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공간에서 만큼은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 거 같다.     

어린아이에게도 죽음은 두렵다.

세상을 다 안다고 하는 백발노인도 죽음은 두렵다.

그저 죽음은 우리에게 각기 다른 형체일 뿐이다.

죽음은 두려움이다.   

  

나 또한 두렵다.

삶에 미련이 많아서 그런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살기 위한 원초적인 원동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삶에 미련이 많기에 살아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하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에 다하고 싶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살아야 한다.  

    

오래...

오래...    

 

 



*글은 밤에 쓰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거 모두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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