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신생아

-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by 정희리


“엄만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그런 거 없었어. 먹고살기 바빠서.”

“할머니 얼굴은 기억 나?”

“글쎄.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는?”

“더 일찍 돌아가셨지.”

“정이 없으니 별로 보고 싶지도 않겠네?”

“엄마는 가끔 보고 싶더라.”

“기억도 잘 안 난다며?”

“그래도... 엄마잖아.”



엄마의 기저귀를 갈다가 문득 76년 전 엄마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엄마도 기저귀 차며 옹알이하던 시절이 있었겠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며, 이유식을 받아먹던 시절도 있었겠지?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일 것이다.


누구나 노인의 모습으로 죽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의 어린 시절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다.

엄마에게 그런 꼬꼬마 시절이 있었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엄마는 처음부터 내 엄마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의 모든 성장 과정을 다 꿰뚫고 있는데 난 엄마의 어린 시절의 모습조차 상상할 수 없다니,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있다면 유추라도 해보겠건만 그마저도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엄마는 6.25가 일어나기도 전에 태어난 탓에 돌사진은커녕 유년기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추억할 사진이 없으니 왠지 어린 시절이 송두리째 오려져 나간 기분이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엄마의 어린 시절을 직접 체험해보는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뽀송뽀송했던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은 엿볼 수 없었지만, 점점 아이처럼 행동하는 엄마와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는 백혈병을 진단받은 이후 급속도로 아이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일곱 살, 여섯 살, 다섯 살... 시간이 점점 거꾸로 흐르더니 결국엔 신생아 수준까지 내려가고야 말았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말도 어눌해져서 평소와 같은 대화도 어려워졌다.

밥 먹는 것조차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엄마들이 아기를 안고 이유식을 떠먹이듯,

나 역시 엄마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게 안고서 밥을 떠드려야 했다.

천천히 한 술, 한 술...

꼭꼭 씹어 삼키라는 당부와 함께.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음식을 거부하지 않고 하루 세끼 꾸준히 드시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곡기를 끊지 않는다는 게 내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그 희망의 불씨가 꺼질세라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엄마의 입에 떠 넣어 드렸다.

더 이상의 반찬 투정은 없었다.

대신 뭐가 드시고 싶다는 요구도 없었다.

그저 아기 새가 먹이를 받아먹듯 내가 건네는 음식을 아무 말 없이 받아 드시기만 했다.

그렇게 표정 없이 한참을 꼭꼭 씹으셨다.

그러다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하셨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감정 기복이 들쑥날쑥한 나와는 달리 엄마는 늘 침착했다.

백혈병을 진단받았을 때도,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할 인생이 많다는 걸 알았을 때도, 항암을 시작했을 때도,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도 늘 표정은 한결같았다.

무.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이 의미하는 건 뭘까.


엄마도 나처럼 표정이 다양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엄마의 표정을 앗아가 버린 걸까.

무수히 힘들었던 세월이,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평생을 괴롭혔던 병마들이, 그리고 끝까지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하게 만든 백혈병이 엄마의 표정을 하나씩 갉아먹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인생이 참 서글프다는 생각에 잠시 먹먹해졌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엄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이 시점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엄마의 성격이 다행이다 싶은 한편 그 속을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또 안쓰러웠다.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데...

너무 아프면 울어도 되는데...

원망하며 소리쳐도 되는데...


나는 신이 공평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신이 공평하네~ 불공평하네~ 떠드는 인간의 잣대를 믿지 않는다.

다만 내 안의 신께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엄마의 시간이 더 이상 거꾸로 흐르지 않게 하소서.

무엇보다 엄마의 통증이 무뎌지게 돌봐주소서.

그리고 부디 이 고통 속에서 엄마를 구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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