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 연습이 필요한 엄마

-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by 정희리


“엄마! 일어나. 걷는 연습 하게.”

“내가 알아서 해. 냅둬.”

“그렇게 계속 누워만 있으면 나중에 걷고 싶어도 못 걷게 돼.”

“걱정 마. 퇴원하면 잘 걸어 다닐 테니.”

“다리 근력이 빠져 버려서 못 걷는다니까?”

“지금 걷다가 넘어지면?”

“안 넘어져."

"또 넘어질 텐데..."

"안 넘어지게 잡아줄게. 딱 한 바퀴만 돌자. 응?”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하는 말이 있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고.


사고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 있었다.

화장실 가고 싶다는 엄마를 침대에서 일으켜 링거 폴대를 잡게 해 드린 후,

침상 커튼을 치기 위해 잠시 몸을 돌린 사이 엄마가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다.

정말 1초도 안 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코~ 어떡해!

어쩌지 못하고 당황해 있는 날 대신해서 옆에 있던 보호자가 간호사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낙상 사고라는 말에 간호사들이 일제히 출동했다.

병동에 있는 간호사들이 다 달려올 만큼 낙상 사고는 병원 측에서도 커다란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골절로 이어지거나 심하면 뇌손상까지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려온 간호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엄마의 체온과 혈압 등을 체크했다.

엄마는 천만다행으로 머리는 부딪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괄약근이 풀려 그 자리에서 대변을 지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거...


간호사들은 엄마의 상태가 정상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난 주섬주섬 뒷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빨리 치워야 한다는 조급함에 똥이 더럽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다 치운 후 돌아보니,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계셨다.

자신의 더럽혀진 몸을 딸에게 맡길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는 똥오줌도 못 가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평생을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사람이 그런 엄청난 실수를 했으니, 그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할까.

이젠 더 이상 내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걸 몸소 직면했을 때의 상실감.

그 깊이를 헤아릴 순 없지만 나 같으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을 것 같다.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만큼.


엄마는 끝까지 아무 말도 없으셨다.

엄마의 무표정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인정? 부정? 체념? 포기?

오히려 오만가지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힌 건 나였다.

엄마의 무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이번 일로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아버리면 어쩌지?


나의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엄마는 도통 침대 밖으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엄마 손목에는 낙상 고위험군 팔찌가 하나 더 추가되었고,

엑스레이를 찍는 것마저 검사실이 아닌 침대에 누워 찍는 걸로 변경되었다.


이대로 엄마가 영영 걷는 걸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계속 침대에만 누워 있으면 근력 손실로 나중에 진짜 못 걸을 수 있다며 협박도 하고,

평생 기저귀에 의지해서 살 거냐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어떻게든 엄마를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워댔다.

딸의 잔소리 폭격에 엄마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매일 걷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엄마의 근력은 놀랄 만큼 많이 빠져 있었다.

운동이 시급했다.

허나 말이 운동이지, 우리의 목표는 아주 소박했다.

대변은 화장실 가서 보기.


매일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한 결과 우리는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운동을 늘려 병동 복도를 한 바퀴 도는 걸로 목표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의 소박한 목표는 곧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계속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변을 대여섯 번씩 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급똥.


그분이 언제 찾아올지 엄마 자신도 모르기에 우리 모녀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난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24시간 껌처럼 붙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물을 뜨기 위해 잠깐 탕비실에 갔는데 같은 병실 보호자가 달려왔다.

엄마가 또 낙상을 했다는 거다.

급히 가보니 간호사가 엄마를 돌봐주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혼자 움직이다가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이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그 어떤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속상하고 가슴 아픈 건 엄마일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또다시 똥 범벅이 된 엄마의 몸을 닦으며 말했다.

“머리로 안 떨어져서 다행이네~”

엄마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처럼 건넨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행여나 나 없을 때 화장실 가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막기 위해 이동식 변기를 침상 옆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규칙을 정했다.


1. 화장실 가서 대변보는 거 취소. 앞으로는 이동식 변기를 이용할 것.

2. 걷는 건 포기할 수 없으니 매일 아침, 저녁 복도에서 조금씩 연습하기.


하지만 이 마저도 힘든 날이 오고야 말았다.

엄마의 체력이 점점 떨어지더니 이동 변기 사용도 힘들어지게 된 것이다.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기운 없이 고꾸라지는 일이 허다했다.

침상에서 이동변기까지 거리는 채 한걸음도 되지 않지만 그마저도 혼자 해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급똥 테러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났고, 난 바닥 청소와 침대시트 가는데 선수가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상이 되어 버린 탓에 당황스럽지도 않다.

민망하고 짜증 날만도 할 텐데 티 내지 않고 잘 견뎌주시니 엄마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뒷정리하는 내 자신도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경지에 다다르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게 엄마의 급똥이 가져온 낙상 사고 덕분이다.


비록 나는 환자의 낙상 사고 하나 방지하지 못하는 무능한 보호자로 찍혔지만,

오늘도 무사히 큰 사고 없이 잘 버텨준 엄마에게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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