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잇몸이 헐고 아파서 뭘 삼킬 수가 없네.”
“치과 협진 부탁한다고 의뢰해 놨어. 쫌만 참아, 엄마.”
“울긋불긋한 피부는 언제 낫게 해 준대?”
“내일 피부과 쌤이 와서 봐준대.”
“내과에선 뭐래? 배 아픈데 왜 약을 안 준다니?”
“검사 결과가 아직 안 나왔나 보지 뭐.”
“눈도 흐릿하니 잘 안 보이는 게...”
“안과도 협진 넣어달라고 할까?”
“에휴... 몸뚱이가 왜 이 모양이라니.”
“종합 병원 좋은 점이 뭐야? 입원해 있는 동안 싹 다 진료받으면 되지, 뭔 걱정?”
뭔가 심상치 않는 병이다 싶으면 무조건 3차 병원으로 달려가곤 한다.
전문의에 대한 신뢰, 최첨단 의료 장비들로 정확한 검사와 체계적인 진료를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병원 내 다른 진료과와의 협진이 가능하다는 것도 커다란 이점이다.
두 달가량 입원해 있으면서 엄마는 소화기 내과, 내분비 내과, 피부과, 정신건강의학과, 치과, 안과 등의 진료과에서 협진을 받았다.
치과나 안과는 검사용 기계 장비를 이동할 수가 없어 직접 진료과로 내려가 진료를 받아야 했지만,
대부분 과는 의사들이 병실을 찾아 환자를 진료해주는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뭔가 형식적인 진료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건 왜일까.
여러 과의 협진을 받았지만 애석하게도 만족할만한 진료를 받은 기억은 없다.
진료를 해주는 의사는 대부분 레지던트들이었는데,
보고를 받은 교수가 오더를 내리는 시스템인지 아님 레지던트들이 알아서 처방을 내리는 시스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깊이 있는 진료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늘 뒤따랐다.
환자의 요청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구색 맞추기식 진료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결국 문제는 터지고 말았다.
엄마는 당뇨를 앓고 있어 하루에 4번씩 당뇨 체크를 하는데 하루는 혈당 측정기가 에러 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당황한 간호사가 다른 체크기를 가져와 다시 체크를 해봤지만 여전히 에러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슐린 주사 처방이 떨어졌다.
인슐린 주사 1시간 후 혈당을 재보니 다행히 숫자는 나오는데 500이 넘는다.
엄마 혈당이 600 이상이어서 측정기가 먹통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서 링거로 투여 중이던 영양제를 일단 중단하기로 했다.
영양제가 당을 많이 올린다는 판단에서다.
이제부터가 진퇴양난이다.
엄마는 식사를 거의 못 드시는데도 불구하고 인슐린은 하루 4번씩 꼬박꼬박 투약됐다.
먹는 양에 비해 인슐린이 과다 투여가 되다 보니 저혈당이 오는 건 당연했다.
어떤 날은 새벽 혈당이 60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인슐린 투여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유일한 대책이라고는 새벽마다 주무시는 엄마를 깨워 오렌지 주스 등을 드시게 하는 게 전부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다 저혈당 쇼크로 사망할 판이다.
인슐린을 주사하러 오는 간호사들에게 몇 번 이의를 제기했지만 자기들은 처방대로 주사하는 거라며 꼬박꼬박 하루 4번 인슐린을 투여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거야? 죽이겠다는 거야?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저녁 혈당이 이 정도면 새벽에는 분명 저혈당으로 떨어진다는 통계치를 예측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내 예측은 언제나 적중했다.
일반인인 나도 통밥으로 맞출 수 있는 수치인데, 왜 전문의들은 나 몰라라 하는 걸까.
의사에겐 우리 엄마가 많고 많은 환자들 중 하나지만, 우리에게 의사는 단 한 명뿐이다.
오직 의사 하나 믿고 의지하는데 이렇게 안일하게 대처해도 되는 걸까?
종합병원 의사들을 보면 대게 본인 진료과가 아닌 다른 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전문 분야가 아니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협진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혈액내과로 입원했다는 이유만으로 내분비내과에선 찬밥 신세다.
협진은 해주지만 내 환자가 아니라는 마인드가 큰 것 같다는 느낌을 꽤 여러 번 받았고,
결국 당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에 대한 변명이나 사과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냥 의료진을 신뢰하며 그들의 처방만을 따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보호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엄마는 넘쳐나는 환자 중에 하나겠지만 내게 엄마는 오직 하나, 유일한 존재니까.
대안이라고 해봤자 별 거 없다. 잠들기 전 과일이나 음료수를 드시게 하는 게 전부다.
취침 전 인슐린을 주사하기에 미리 혈당을 올려놓지 않으면 저혈당 올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인슐린을 투약하지 않으면 굳이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단 것들을 의무감으로 챙겨 먹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났다.
내 속도 모르고 엄마는 평소 당 오를까 봐 못 먹던 과일과 음료를 먹는다며 좋아하신다.
벌컥벌컥 원샷을 때리고 캬~ 소리를 내는 엄마의 모습에 화가 누그러진다.
그래. 잠시라도 엄마가 행복했으면 됐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넘길 수 없기에 담당 레지던트와 상의를 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당뇨약 및 인슐린 처방은 내분비내과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혈액내과 레지던트가 오더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엥? 뭐지?
분명 내분비내과에서 협진을 받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혈액내과 레지던트에게 그 일이 토스된 걸까.
처음 듣는 얘기에 당황스러웠다.
레지던트가 한 달 단위로 각 진료과를 돌며 실습을 하고 있기에 어제의 혈액암 레지던트가 내일의 내분비내과 레지던트가 하는 일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개운치 않은 감정은 뭘까.
이럴 거면 협진은 왜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병원 시스템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밀려왔다.
어쨌거나 보호자의 건의와 엄마의 지속적인 저혈당으로 인슐린 처방이 줄긴 했지만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다.
병원의 처방을 믿고 따르는 게 마땅하지만 환자 몸에 어떤 약물이 투약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이상하다 싶을 땐 강력하게 건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형 병원은 항상 많은 환자들로 붐빈다.
응급실에 실려 들어와도 병실을 배정받기까지 여러 날이 걸린다.
외래도 마찬가지다.
1분 남짓의 진료를 보기 위해 1시간 이상 기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워낙 많은 수의 환자를 대하다 보니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의사는 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힘들다고 한다.
환자는 의사의 수가 적다며 불편함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의사를 좀 더 늘리면 되잖아?
의료진도 힘들고, 환자도 힘들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힘들어야 하는 걸까.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