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1인실이 좋긴 좋네. 근데 비싸지 않아?”
“그냥 호캉스라고 생각해.”
“빨리 다인실로 옮겨달라고 해.”
“엄마 자꾸 그러면 확 특실로 옮겨버린다?”
“우리 딸 간뎅이가 부었네~”
“돈 아까우면 빨리 나아. 퇴원해서 진짜 호캉스 가자.”
고공행진 중이던 염증 수치가 처음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열은 계속 38도를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밤에는 39도를 넘어버렸다.
간호사들이 체온을 체크하기 위해 1시간 간격으로 들락거리고, 그러다 보니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숙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두 시간만이라도 푹 자봤으면 좋겠다며 엄마가 짜증을 내신다.
새삼 그 짜증이 반갑다.
짜증을 낸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담당의였던 레지던트 말에 의하면 엄마가 처음 응급실로 오셨을 때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한다.
연명치료 여부를 물을 정도였으니 오죽했으랴.
다행히 염증 수치가 떨어지면서 연명치료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고열도 곧 잡힐 거라는 희망적인 소견과 함께 우리는 다인실로 병실을 옮길 수 있었다.
혈액암 병동이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까지 겪어봤던 병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우리 병실에는 거동이 불편한 중증 환자들이 대다수였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본능 중심의 생존 게임이 펼쳐진다.
각자의 병상 안에서 인간의 3대 본능이 모두 해결된다.
먹고, 자고, 싸고.
인터넷에 ‘먹고 자고 싸고’를 검색하면 신기하게도 육아 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만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건 중요하다.
병원에서도 매일 체크하라며 병상 아래 일지를 매달아 둔다.
물은 얼마나 마셨는지, 밥은 얼마나 먹었는지, 소변량은 얼마나 되는지, 대변은 몇 번 봤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환사 상태를 살피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기에 귀찮아도 의무감을 갖고 해야 한다.
병원에 있다 보면 보호자가 할 일이 상당히 많다.
매끼 밥을 안 차려도 되는 건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엄마 식사에 대한 고민은 병원에서도 여전했다.
엄마가 병원 밥을 드셔주시면 너무 좋겠지만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다른 먹거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반식에는 밥 말고 특식을 고를 수 있기에 그나마 드셨는데 병원측에서 당뇨식으로 바꿔버렸다. 당뇨 환자가 당뇨식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엄마에게 중요한 건 당뇨가 아니다.
가뜩이나 입맛도 없는 환자이기에 무조건 먹을 수 있을 걸 드려야 한다며 일반식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호중구식으로 바껴버렸다. 호중구가 500이하이기 때문에 엄마는 멸균식을 드셔야 했다.
이건 바꿔달라 요청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아침으로 나오는 죽은 드신다는 거.
아침은 병원에서 제공되는 죽을 드시기에 걱정이 없으나 문제는 점심 저녁이다.
일반식도 아니고 멸균식을 어디에서 사다 날라야 하나...
정말 쉽지 않은 미션이다.
차라리 집에서 매끼 내 손으로 밥을 차려 드리는 게 낫지.
매일 엄마가 드실 수 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는 건 선택지가 많지 않기에 더욱 날 힘들게 했다.
병원을 아무리 휘젓고 다녀도 편의점에서 파는 통조림 등의 멸균식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매번 밖에 나가 팔팔 끓인 걸 사다 나를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전자레인지 조리법.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엄마가 드실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것을 찔 수도 있고, 부드러운 달걀찜도 가능하다.
병원에서 제한한 컵라면이나 떡국 같은 것도 전자레인지에 넣고 팔팔 끓여서 드릴 수가 있다.
요리가 가능한 건 뭐든 넣고 보글보글 끓여 멸균식으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전자레인지가 건강에 좋으냐 안 좋으냐 말이 많지만 그런 건 따질 여유가 없다.
엄마가 뭐든 드실 수만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단, 전자레인지 사용은 이용자가 많은 식사시간을 피해야 한다는 애로사항은 있다.
오래 입원하다 보면 식사도 문제지만 씻는 것도 문제다.
얼굴과 몸이야 물수건으로 닦으면 된다지만 떡진 머리는 답이 없다.
휠체어와 한 몸이 되신 엄마의 머리를 어떻게 감겨 드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병원 미용실을 찾았다.
머리만 감는데 무려 만 팔천 원.
네???
병동에 샤워실이 있지만 엄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어림없다.
일주일에 한 번 신청자에 한해서 머리 감겨주는 세발 서비스가 있긴 하지만 경쟁률이 높아 매주 받을 수가 없다.
그렇게 세발 서비스에서도 밀리고, 샤워실까지 갈 기운도 없으시고, 미용실은 턱없이 비싸고.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물건이 하나 있었으니....
세발 서비스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기계가 복도 끝에 세워져 있는 것이었다.
심봤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호기롭게 빌려와서 겁도 없이 엄마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기계도 익숙하지 않고, 2명의 봉사자가 하는 걸 혼자 하려니 아주 난리도 아니다.
이러다 병실을 물바다로 만들 판이다.
엄마 머리에는 이미 샴푸 거품이 한가득이라 이대로 멈출 수도 없고... 대환장 파티다.
사람은 죽으란 법 없다고,
어리바리 당황하는 내 모습에 복도를 지나가던 베테랑 보호자가 들어와 손수 시범을 보이셨다.
용기가 가상하다는 칭찬(?)과 함께.
덕분에 엄마 머리 감기기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지만 다신 그 기계를 빌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 배운 요령으로 생수병 두어 개와 세숫대야를 이용해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의 머리를 감겨드리는 법을 터득했고, 입원 내내 엄마는 딸이 제공하는 세발 서비스를 받으셨다.
엄마의 몸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열과 염증이 들쑥날쑥한 탓에 퇴원은 하염없이 미뤄졌다.
한 달 이상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간호사들은 물론 인턴과 레지던트와도 친해져 서로 개인적인 안부로 주고받는 사이까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만 친해져도 되는데...
병원에서의 나의 유일한 낙은 커피 원두를 갈아 내려 먹는 일이다.
선물 받은 휴대용 커피 그라인더를 챙겨 온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자유롭지 못해 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짧지만 커피 향만큼이나 감미로운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커피 향에 이끌려 온 보호자와 간호사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일 또한 나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호캉스는 언제쯤이나 가볼 수 있으려나...
그렇게 나는 암병동 죽순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