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혈병 걸린 엄마를 돌보는 철부지 딸의 육모 일기 -
“엄마, 뭐 먹고 싶어?”
“아무 생각 없어.”
“잘 드셔야 빨리 낫지. 말해봐. 뭐든 다 해줄게.”
“배추 겉절이.”
“생야채는 먹으면 안 된대. 젓갈류도 안 되고.”
“그럼 상추는?”
“당연히 안 되지. 익힌 걸로 말해봐.”
“낙지볶음, 매콤하게.”
“낙지나 오징어 같은 것도 안 된대. 새우 같은 갑각류도 안 되고, 닭발이나 순대도...”
“..... 그럼 팥빵이나 사 오던가.”
“빵에 크림이나 뭐 들은 건 안 된대. 빵도 밀봉된 것만 먹으라고...”
엄마는 10여 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땐 정말 겁 없이 뭐든 다 드셨다.
익히지 않는 날것은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많이 드신 게 '멍게'다.
항암 때문에 집 나간 입맛을 돋우는데 멍게만 한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뭐든 먹어야 기력을 차린다는 이유로 엄마는 뭐든 가리지 않고 드셨고 다행히 별 탈은 없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힘든 치료과정을 이겨내고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단순히 음식을 조심하라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할 음식 목록이 적힌 프린트를 병원에서 제공받을 정도로 음식 제한이 까다로웠다.
백혈병을 진단받자마자 병원에게 식단 교육받는 시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같은 암인데도 백혈병은 먹지 말라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먹어도 되는 음식 vs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적힌 프린트를 보며 엄마와 늘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먹어도 되는 음식의 가짓수가 훨씬 더 많지만 엄마가 먹고 싶은 건 언제나 먹지 말라는 음식들뿐이었다.
호중구 수치가 500 이하일 때는 세균 감염의 위험도가 높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한다며 교육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엄마는 호중구가 500 이상일 때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밥상은 매일이 살얼음판이요, 전쟁의 연속이었다.
음식 제한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매끼 그때 만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리한 지 1시간이 지나면 세균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면 그 즉시 먹어야 한다고 한다.
살면서 내가 하루 세 번 밥과 반찬을 매번 새로 조리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해야지.
다행히 엄마의 요구는 간단했다.
아침은 죽,
점심은 밥 말고 간식 같은 특식.
저녁은 밥.
엄밀히 말해 저녁은 엄마가 아닌 나의 요구사항이었다.
아무리 밥맛이 없다고 해도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기 위해 한 끼 정도는 식사다운 식사를 챙겨드리고 싶었다.
나의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내일의 식단을 짜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점차 요령이 생기면서 엄마 맞춤형 레시피들이 하나 둘 탄생하기 시작했다.
죽을 끓이는 것 하나에도 요령이 필요했다.
어쩌다 먹는 죽이 아니라 매일 아침 죽을 드시다 보니 질리는 건 당연지사.
매일 같은 죽만 드시게 할 수 없기에 매번 다른 종류의 죽을 끓여야 했다.
처음엔 죽 하나 끓이는데도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며 주방이 난장판이 되곤 했지만 요령을 터득하고 나니 30분 안에 죽 하나를 뚝딱 끓일 수 있게 되었다.
흰 죽 하나만 잘 끓여두면 다른 죽 끓이는 건 정말 식은 죽 먹기였다.
그 노하우를 공개하자면,
불러둔 쌀에 참기름을 넣고 달달 볶다가 쌀의 8배 되는 물을 넣고 끓인다.
팔팔 끓으면 휘휘 저어가며 끓이다가 물이 어느 정도 쫄면 약불로 바꿔 뜸을 들인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흰 죽 끓이는 방법이다.
영양소가 필요한 환자에게 흰 죽만 드시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전복죽을 끓이면 좋겠지만 병원에서 조개류는 안 된다고 해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고민이 필요했다.
영양이 골고루 들어 있는 죽이 뭘까?
문득 환자들이 먹는 뉴케어 같은 영양 음료가 떠올랐다.
그래서 과감히 시도해봤다.
물의 양을 좀 덜어내고 영양 음료 한 통을 부어 끓여봤더니 제법 맛이 났다.
엄마가 죽을 드실 때 다른 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이렇게라도 영양소를 채워야 했다.
하지만 두어 번 드시더니 맛이 질린다며 거부.
또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죽을 끓일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죽 끓이고, 요리하는데 시간을 쓸 순 없으니 묘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흰 죽을 한 번 끓일 때 2~3번 먹을 양을 끓이는 방법을 택했다.
남은 흰 죽은 냉장 보관 후 다음 날 새로운 죽으로 재탄생시키는 걸로 방향을 잡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남은 흰 죽에 물을 조금 부은 뒤 버섯, 소고기 간 것, 야채 등을 추가하거나 혹은 나물을 추가로 넣어주면 새로운 죽으로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야채는 냉장고에 있는 거 다져서 사용하면 되고, 나물은 익힌 후 소분해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언제든 꺼내 사용할 수 있으니 세상 편했다.
아욱, 시금치 등의 나물죽에 가끔 된장을 풀어주면 또 다른 죽으로 재탄생되니 얼마나 레시피가 다양한지.
이것도 질리면 그다음으로 콩죽이 대기하고 있다.
1. 콩을 깨끗이 씻어서 서너 시간 불려둔다.
2. 불린 콩을 한 시간가량 팔팔 삶는다.
3. 익힌 콩을 식혀서 냉동실에 소분해둔다.
4. 먹기 전 해동한 콩을 믹서기에 간다.
5. 흰 죽을 팔팔 끓인 뒤 간 콩을 투입, 계속 저어가며 팔팔 끓여준다.
이렇게 준비해두면 언제든 검정콩, 흰콩, 병아리콩 등의 콩죽을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나 둘 하다 보면 시중에 파는 죽집 메뉴판이 부럽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점심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아침에 죽을 드셨으니 점심은 든든한 식사를 하시면 좋으련만, 여전히 입맛이 없으시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특식 메뉴를 고안해 내야 한다.
가장 만만한 건 엄마가 좋아하는 잔치국수.
멸치 육수에 소면만 넣으면 끝이다.
고명 만드는 게 좀 귀찮긴 하지만 어차피 1인분이라 호박, 버섯, 당근, 양파 등의 야채를 큰 프라이팬에 휘리릭 볶으면 되니 세상 편하다.
잔치국수가 질린다 싶으면 어묵을 추가해서 어묵 국수, 볶은 김치를 넣어 김치 국수, 유부를 듬뿍 올려 유부국수... 그러다 가끔은 비빔국수까지.
국수 하나로도 언제든 변주가 가능하다.
부침개도 쉽게 할 수 있는 단골 메뉴 중 하나다.
뭐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밀가루에 계란 입혀 굽기만 하면 된다.
감자전, 호박전, 동태전, 김치전은 기본이요, 냉동실에 소분해둔 각종 나물들도 전으로 탈바꿈이 가능하다.
시금치는 물론이거니와 세발나물, 취나물, 곤드레 나물, 아욱... 심지어 두릅까지 모든 다져서 굽기만 하면 된다.
나물은 한번 다듬어 삶은 후 냉동실에 소분해두면 아주 유용하다.
밥을 차릴 때는 나물볶음으로, 죽을 끓일 때는 나물죽으로, 전으로 구우면 나물 전으로 쓰임이 아주 다양하다.
자, 이제 대망의 저녁 식사 메뉴만 남았다.
반찬 3개, 국 1개, 최소 4찬은 있어야 밥이 넘어갈 텐데, 메뉴를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민하는 날 불쌍히 여기시어 엄마는 항정살 구워서 상추에 쌈 싸 먹자고 하신다.
옛날 같았으면 세상 편한 메뉴지만 엄마는 생야채를 드실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상추를 살짝 익혀서 겉절이라며 무쳐 드렸더니 맛만 보고는 안 드신다.
오이 무침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소금물에 담갔던 오이를 익혀 무쳐드렸더니 역시나 안 드신다.
그렇다면 평소 노래를 하던 배추 겉절이.
역시나 소금에 절인 배추를 물에 살짝 익혀서 무쳤다.
고춧가루도 안심할 수 없어 거의 희멀겋게 무쳤는데 이건 제법 드신다.
젓갈을 넣지 않았는데도 아무 소리 없이 그냥 드신다.
이쯤 되면 엄마도 포기 상태다.
계속 말해봤자 원하는 걸 먹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김치는 매번 새로 만들 수 없기에 작은 알배기 배추 한 통을 담아 냉장고에 보관.
드시기 전 멸균을 위해 전자레인지에 1분가량 돌리는 건 필수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뭐든 익혀서 식사를 차려드리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짠했다.
김치 하나 맘대로 못 드시니 얼마나 힘드실꼬...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