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 욘 포세 (1996)
평소 100년은 더 지난 고전 작품들 위주로 많이 보는 편인데 노벨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작품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현대에 나온 작품 중 나름 고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대되었다.
막 책장을 열어서 읽어나가는데 어떤 놀이가 생각났다.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수박도 있고,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수박도 있고 고등어도 있고...." 짧고 간결한 문장의 무한 반복이 나를 반겨주었다.
오 이 주인공... 보통 증세가 아니다. 자신이 느끼고 상상한 것을 그대로 믿는 데 떠오르는 생각을 스스로 무한 반복하여 스스로를 각인시켜 믿어버리게 한다. 이런 반복하는 말들이 사실도 있지만 과대망상에서 나온 것들과 뒤섞여 있었다. 이런 증상 더하기 지금 실제 옆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곁에 있다고 생생히 느끼고 그들과 대화도 한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이 겪었던 조현병, 흔히 말하는 정신분열의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그는 풍경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그에게 전부이다. 그에게는 절대적 기준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긴다.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1,2차원의 사고만 가능하다. 그 사고들이 끊임없이 그의 생각을 채우기 때문에 더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신이 확신하는 것 말고는 다른 여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그의 멈추지 않고 계속 채워지는, 큰 의미 없는 생각들의 나열이라 자칫 지루할 수 있으나 갈수록 그의 생각은 점점 자극적으로 변한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절로 긴장감이 형성돼서 점점 지루할 틈이 없어진다.
주인공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노르웨이 작은 섬사람인데 너무너무 가난하다. 하지만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고 후원자 덕분에 독일까지 유학을 와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가 머물고 있는 하숙집 주인 딸 헬레네와 사랑에 빠졌다. 안타까운 건 헬레네가 고작 열대엿살이라는 것이다. 헬레네가 그의 방에 간다는 것을 그녀의 엄마와 아빠 대신 그녀를 돌봐주는 삼촌(아빠의 동생)이 알게 되고 그래서 라스에게 그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헬레네가 라스에게 전해주는데 그는 헬레네가 자신이 나가길 바란다고 생각한다. 삼촌이 그를 내쫓으려고 하는 이유는 헬레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기 위해 쫓아낸다고 생각한다. 라스는 짐을 다 싸 들고나갔으나 헬레네가 자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해서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오고 결국 경찰까지 출동한다.
여기에서 그는 노르웨이 화가들이 모이는 술집 말카스텐에 갔었는데 그의 온전하지 못한 정신을 가지고 친구들이 짓궂게 놀린다.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 안타깝고 씁쓸했다. 무엇보다 그의 또래들은 철없어서 그렇다고 치고 그의 재능을 알아봐 준 스승 한스 구데조차 그곳에 있으면서 그를 위해 어떠한 보호 조치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더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그의 작품을 협회에 잘 팔아볼 생각만 있었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더 비극적인 상황이고...
그다음 배경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라스의 모습인데 그는 가끔 갈매기들을 생각하며 차분하게 지낼 때도 있으나 거의 쉴 새 없이 자위행위를 한다. 그 행위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거고 나아지지 않으면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그의 보호사와 원장이 경고한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건 그의 영혼에게는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엄청 불안해하며 반드시 병원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무한 반복한다. 그는 사랑하는 헬레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할 거라는 생각과 그녀가 자신의 삼촌과 계속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끊임없는 생각으로 인해 정신분열상태로 지낸다. 이런 생각에 가득 차 있는 그는 원장과 상담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자위행위를 한다.
다른 내용들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림 그리는 것이 생명 같은 사람에게 그걸 뺐어가 놓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말이 되나 싶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그 희열과 충만한 감정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것 같은데 그가 집착하듯이 자위행위하는 것이 너무 이해가 되었다. 잘못된 처방이 그를 더 미치게 만드는데 한몫한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까웠다.
이 이야기 뒤는 대략 100년 후 라스의 이야기로 글을 쓰려고 하는 그의 먼 친척 작가 비드메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까지가 1편이다. 비드메는 사제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나누고 싶어 했는데 자기 속한 곳의 교구가 여사제 마리아다. 정식 사제도 아니고 대리로 그 일을 맡고 있었는 데 자신의 설교 들으러 오진 말고 대화하고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다시 자기 집으로 오라며 그에게 차와 와인을 대접한다. 비드메는 다신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아의 집에 나온다. 하지만 예쁜 가슴에 아름다운 얼굴을 언급하며 그녀의 매력적인 외모를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또다시 그녀의 집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로 이야기는 끝난다. 여기선 재밌게도 작가의 종교에 대한 생각들이 나오는데 아직 고민 속에 있는 현재 상태가 잘 나타난다.
2편은 라스의 누나 올리네가 나이가 많이 들어 치매 증상이 심하고 발의 통증도 심해서 정말 사는 게 힘든 데 그 와중에도 예전의 라스에 대한 기억만큼은 또렷이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해 계속 회상한다. 어렸을 때부터 특이했던 라스. 천재였지만 너무 안타깝게 빨리 간 라스. 너무 멀쩡하고 잘 지내다가 갑자기 눈빛이 바뀌며 화가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라스. 이런 동생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 하나 정작 올리네 본인은 지금 화장실에서 배변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급하게 마려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변기에 앉으면 안 나오고 자기도 모르게 배설물들이 새서 속옷이 젖어있으나 그것 조차 모른다. 급기야 둘째 남동생 쉬버트가 위독하여 누나가 보고 싶으니 꼭 오라고 평소엔 얼굴도 안 보는 올케 시그네의 청도 잊고 있다가 늦게 쉬버트를 만나러 가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다. 동생의 죽음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자신의 아픈 발만 생각하고 식사 준비만 생각하다가 쉬버트를 만나러 오라고 했었나 할 만큼 기억력이 없다. 그러다 배에 불편함을 느끼고 화장실에 앉아서 평안을 느끼며 라스 곁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2편은 올리네의 화장실 문제로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정말 리얼하다. 아주 튼튼한 장을 가지지 않았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화장실 문제로 힘든 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가기도 꺼려지고 안 가기엔 불안한 그 찝찝한 느낌이 들 때의 괴로움...
쉬버트가 자신과 정말 친했던 동생이었다고 올리네는 설명하나 정작 머릿속엔 라스에 대한 추억만 가득해서 쉬버트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크게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현재 상태가 심한 치매라 방금 일어난 일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회상하는 내용에서조차 쉬버트 이야기는 거의 없는 것이 쉬버트에겐 슬프고 참 서운할 듯싶었다.
주인공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 인물이며 실제로 이런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검색해 보니 이 책 표지 그림을 포함하여 그의 풍경화들은 신비스럽고 몽환적인데 분명한 힘도 느껴지고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여서인지 보통 사람의 시선이 아닌 글임에도 진실된 글에서 나타나는 힘이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인상적이었던 건 갖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라스의 마음이 너무나 잘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왜 더 깊이 생각할 수 없는지, 그가 왜 계속 불안할 수밖에 없고 계속 같은 생각들을 하며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이 느껴져서 그런 증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삶을 강렬하게 체험한 기분이었다. 이런 많은 반복적인 구절들을 이렇게 밀도 있게 쭉 끌고 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힘인 것 같다. 왜 사람들이 욘 포세에 대해 극찬하는지 알 수 있었던 작품 <멜랑콜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