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허 이태준 문학의 산실 수연산방
▲ 수연산방을 만년필로 그렸다. 펜 느낌이 좋아서 채색을 안하고 붉은 낙관만 찍었다. ⓒ 오창환
상허(尙虛) 이태준 고택을 찾아가기 위해 안국역에서 마을버스 종로02번을 타고 성대 후문, 와룡공원 정류장에서 내렸다. 분명히 지도 상으로는 여기서 17분을 가면 이태준 고택이 나와야 하는데 여긴 산이 아닌가. 흔히 사용하는 지도 앱이 대체로 정확한데, 이럴 때 보면 앱의 상상력이 너무 없는 건지 아니면 너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삼청공원과 와룡공원을 넘는 등산이 시작됐다. 산을 하나 넘으니 성북동인데 여기서도 여전히 17분이 더 걸릴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불어서 물소리가 상쾌하다. 그 옛날 이태준 작가의 집 앞에도 이 개울물이 흘렀겠지만 지금 그 집 앞 개천은 복개돼 도로가 돼 있다.
이태준 고택 수연산방은 현재 찻집으로 이용되는데, 손님들이 줄을 서 있다. 이곳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본다. 그림을 그리려고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마당에 나무가 너무 많아서 건물이 드러나는 각을 잡기가 힘들다. 따가운 햇볕 아래 스케치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오락가락한다.
이태준, 그의 발자국
소설가 이태준은 1905년 철원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 집에서 자랐다. 그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여 휘문 고등 보통학교와 일본 조치 대학을 다녔으나 두 학교 모두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귀국 후 1929년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와 잡지사에서 기자와 편집자로 일하였다. 그가 조선중앙일보 기자 있던 있던 1934년에는 이상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고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의 허락을 받아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게재했는데, 그 시가 <오감도>다. 이 시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연재가 중단됐지만, 지금 보면 노이즈 마케팅으로는 최고였던 것 같다.
그는 1939년부터 41년까지 문예지 <문장>을 발행해 자신의 작품도 발표하고 신인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이효석, 김기림, 정지용, 유치진 등과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정말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분들이다.
이태준 작가는 어린 시절에는 고아로 어렵게 자랐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편집자나 기자로 늘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문인들에 비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한 듯하다. 직장 생활을 한 지 5년 만인 1933년에 이 집을 지었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당호도 스스로 지었는데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 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이다.
당시 성북동은 사대문 밖이라 땅값이 비교적 저렴해서 문인들이 선호하는 곳이었고 건물은 철원에 있는 외갓집을 옮겨와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의 형태는 전형적인 경기 지방 한옥 구조인 기역 자(ㄱ) 집이었는데 이 뒤편에 증축을 해서 면적을 넓혔다
이 집에서 가장 멋진 부분은 안방에 연결된 누마루다. 누마루란 누각과 마루가 합쳐진 공간으로 아래가 비어 있는 공간이다. 한옥 건축에서는 가장 멋지고도 사치스러운 공간이 누마루다. 누마루가 멋진 것은 건물 안팎이 연결된 경계의 공간이기 때문이고, 사치스러운 이유는 난방을 포기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사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태준, 수연산방, 행복
그가 1942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무연(無緣)>에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살던 철원에 가서 외갓집에 들르는 묘사가 있는데, 누마루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윗말로 올라서 우리 외갓댁이던 집을 찾았다. (중략) 사랑 마당에 들어서니 기억은 찬찬하나 눈에 몹시 설어진다. 누마루가 어렸을 때 우러러보던 것처럼 드높지는 않다. 삼면 둘러 걸 분합이던 것이 유리창이 되었다. 전면에 '호상루(濠想樓)'란 현판이 붙었는데 없어졌고, 붕어 달린 풍경도 간데없다. 사랑방은 미닫이가 닫겨 있었다. 누마루 밑을 돌아 연당으로 가보았다. 연은 한 포기도 없이 창포만 무성한데 개구리들만 놀라 물로 뛰어든다.
이태준 작가는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단편으로는 달밤, 고향, 돌다리 등과 장편으로는 <황진이> <왕자호동> 등 주옥같은 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성북동과 수연산방이 배경으로 많이 나오는 걸로 봐도 그가 이 집을 얼마나 아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당대의 명 문장가로도 유명했는데, 그가 저술한 글쓰기 교본인 <문장강화(文章講話)>는 놀랍게도 지금도 글 쓰는 이들에게 전범이 되는 책이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無序錄)>도 이 집에서 썼다. 무서록은 책에 실린 글을 순서 없이 썼으므로 읽을 때도 아무 글이나 순서 없이 읽으라는 뜻에서 붙인 제목이다. 제목을 뽑는 것만 봐도 참 모던한 감성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수연산방에서 지낸 13년 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태준 작가는 1946년 월북을 하게 되고 북에서 활동을 이어가지만 1956년에 북한 당국에 의해서 숙청됐다. 그 후 창작을 못했음은 물론이고 공장과 탄광을 전전하면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망 시기도 알려지지 않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북 후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그의 존재가 지워졌으나 1988년 복권이 된 뒤에서야 다시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파초는 어떻게 됐을까
▲ 수연산방 누마로 쪽에서 입구를 바라봤다. ⓒ 오창환
<무서록>에 보면 <파초>라는 글이 있다. 동네 사람이 작가가 애지중지 키우던 파초를 팔아버리라는 장면이 나온다. 파초는 남방에서 수입된 화초라 파초에 꽃이 피면 우리나라에서는 다음 해에 죽기 때문에 미리 팔아버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답이 곧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정말 파초가 꽃이 피면 열대지방과 달라 한번 말랐다가는 다시 소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당에서, 아니 내 방 미닫이 앞에서 나와 두 여름을 났고 이제 그 발육이 절정에 올라 꽃이 핀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가 한번 꽃을 피웠으니 죽은들 어떠리! 하물며 한마당 수북하게 새순이 솟아오름에랴!
오후가 되니 손님들도 많이 줄고 그림도 다 돼간다. 비도 그치고 다시 해가 난다. 지금 나무들도 좋지만 정원에 파초를 심어 놓으면 더 멋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그때 그 파초는 다음 해에 어떻게 됐을까?
▲ 수연산방 전경. 양철로 된 빗물받이가 날개처럼 보여서 집이 마치 날아오를 것 같다. ⓒ 오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