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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만 Mar 24. 2017

이별

므두셀라 증후군


열린 창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며들어 오자 밤이 내려앉은 커튼은 마법에 걸린 융단처럼 바람 장단에 펄럭 펄럭 춤을 추었다.   침대 한 귀퉁이에 쏟아지는 달빛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참에 휴대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전송되었다.


낯선 번호였다.  으레 전송되는 스팸이겠거니 하고 무심결에 지나치려 하다가 메시지 내용을 얼핏 확인하고서는 스탠드의 전등을 켜고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메시지의 내용은 매우 간결했다.


"Seilerstätte 44020, Linz. 43 732 76770. Marski "


메시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통화가 된 곳은 오스트리아 린츠 시내의 한 병원이었다.  전화번호와 동반한 메모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매르스키...'  


이튿날 새벽 일찍이 기차를 탔다.  뮌헨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잘츠부르크에 내려 다시 플랫폼을 바꾸어 린츠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햇빛이 쏟아지는 중부 오스트리아 들판의 풍경이 고대 이집트의 보리밭처럼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와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폴란드 크라쿠프 인근의 오시비엥침. 세상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로 알고 있는 곳이었다.  바람 반쯤 빠져버린 풍선이 흐느적거리듯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를 다니는 대신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새 코 밑으로 수염이 숭숭하게 돋아나기 시작했던 그와 내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서로 헤어져야 했을 때 우리는 이미 청년이 되어 있었다.   


린츠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그의 이름으로 신원확인을 요청하자 나이 든 간호사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었다.  그러다 그녀는 금세 내 이름을 확인하며 인터폰을 들어 누군가를 호출했다.


10여분 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명함 한 장을 내밀며 매르스키의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병원 인근의 한 식당에서 우리는 식사를 함께 했는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그와 나는 다소 서먹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는 과묵했고 나는 사교적이지 않았다.


식사가 겨우 끝나고 그와 커피 한 잔씩을 어색하게 나누고 나서야 나는 매르스키의 근황을 비로소 그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변호사가 옆 의자에 두었던 자신의 검은색 가죽 가방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매르스키가 내게 보내는 편지라고 했다.  


변호사는 오후 다섯 시경 병원에서 매르스키와의 면회가 가능할 듯싶다며 잠시 개인용무를 마친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인근의 호텔에 숙소를 하나 예약해 두었으니 자신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호텔에서 잠시 쉬고 있으라고 하며 자신의 차로 나를 태워 호텔 로비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호텔 방에서 린츠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물컵에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후 변호사가 건네 준 편지봉투를 열었다.  어린아이가 쓴 듯한 글씨.  매르스키였다.


크래머,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가?  자네는 이미 나를 잊고 살겠지만 나는 자네의 소식을 그간 틈틈이 듣고 있었다네.  자네가 쓴 책들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지.  언젠가 비엔나에서 가졌던 자네의 도서출판 행사에도 들러 멀리서나마 자네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었지.  무척 근사해 보이더군.  자네는.

요즈음 들어서 내 눈이 예전만 못하네만 다시 알음알음 성경을 읽고 있다네.  전쟁 이후 난 지독한 무신론에 빠져 들었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내 삶의 영원한 위로가 되어 주었던 안나로부터 다시 성경 읽기를 권유받았다네.  비록 안나는 5년 전 내 곁을 떠나 밤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말이네.

성경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던 이가 '므두셀라'였는데 그는 대홍수가 시작되던 해에 생을 마감했다네.  그의 나이 969세였지.  

노아와 그 일가가 방주를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조력자였고 세상의 멸시와 방해로부터 방주의 준비과정을 일일이 지켜 내었던 그였지만 항상 그의 머릿속에는 지나간 날들의 아름다웠던 기억들로 가득했었어.  방주를 완성했던 노아가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노아와 함께 방주에 오르는 걸 단호히 거부했지.  그는 새 포도주가 새 자루에 담기기를 진정 바랐던 것이네.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하고 그 타락이 끝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 그 타락한 세상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네.  이해할 수 있겠나? 그는 대홍수가 일어나던 해에 방주에 오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던 걸세.  손자인 노아에게 새 시대의 맏형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끝내 구 시대의 막내로 남기로 한 거지.

크래머,

자네가 기억해 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밀래스키'라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네.  수용소에서 그 아이를 잃고 말았지.  형으로서 그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은 늘 내 남은 생의 그늘이었어.  

전쟁 이후 내가 가지고 있던 꿈을 자네에게 이제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네를 생각할 때마다 자꾸 밀래스키가 떠오르는 걸 부인할 수 없다네.  학교를 하나 지어주게.  그리고 그 학교의 이름에 내 동생 밀래스키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겠나?  지켜주지 못했던 그 아이에 대한 이 형의 마지막 소망이 될 테니.

어두움 속에서 작은 빛이 더욱 빛을 발하듯이 어려웠던 시절 자네는 내게 언제나 희망이 되어 주었고 난 항상 그걸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왔다네.  


매르스키.


오후 4시 30분경 호텔 로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변호사였다.  그는 나를 병원으로 다시 안내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부인과 사별하고부터 매르스키는 통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피한채  혼자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알츠하이머 증상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졌는데 담당의사는 그의 증상이 소위 '므두셀라 증후군'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내었다고 했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상실해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행복했다고 여기는 순간의 부분적인 기억을 편집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했다.


매르스키의 변호사는 내가 병실로 들어서기 전 매르스키가 7억 유로의 유산을 남기게 되었는데 나를 그 상속인으로 지정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법적인 절차에 대해 몇 분안 설명을 계속했으나 나는 그의 이야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있던 매르스키는 나이보다 더 늙어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간호사 한 명이 자리를 이내 피해 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나는 수용소 시절 그와 함께 불렀던 멜로디 하나를 막 기억해 내었다.  그의 한 쪽 손에 내 손을 깍지 끼우고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감겨있던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듯 보였다.


그 멜로디가 막 끝났을 때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던 심장박동기의 펄스가 긴 수평선을 그었고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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