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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Jun 11. 2024

행복, 성적순은 아니지만

“유주야 엄마 오늘도 만보 찍었다. 근데 50원도 안 되네.”

“어, 잘했어.”

영혼이 없습니다.

“만보 찍는 거 엄마 힘들었는데, 앱에서 만보를 다섯 번에 나누어 포인트를 주니까 생각보다 쉽게 되더라.”

“어.”

또 영혼 없고요.

“그러니까 유주 숙제도 나누어서 하면 좀 수월하지 않을까?”

“알아. 나한테도 다 계획이 있다고.”

아무리 봐도 계획이 없어 보이는데, 뭘 믿고 저리도 태평한 걸까요?

아빠표 수학을 공부하면서 매번 깨지고 혼나도 딱히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잔소리는 듣는 쪽도 하는 쪽도 힘든 법이잖아요.

 즐거운 주말, 아빠와 약속한 수학 과제를 시간 내 완수하지 못해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여보 나와봐. 유주도 앉아.  니 생각을 말해. 니가 한다고 해서 약속한 분량이었어. 이모들 온다고 해서 아빠가 분량도 줄여줬잖아. 무려 3일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진짜 이해가 안 돼.”

묵묵부답입니다.

“시간 관리 어릴 때 습관 못 잡으면 평생을 그렇게 사는 거야. 아빠가 몇 번을 말해.”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꾸지람의 대상이 과연 딸이 맞나 싶어 지면서 슬슬 부아가 끓기 시작합니다.

‘번번이 시간 약속 못 지킨 죄, 주도적이지 않은 죄, 무계획이 계획인 죄,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이거 다 내 얘기인데….’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한바탕 설교를 듣고 묵직한 공기에 서로가 힘에 부치는 참인데, 구원처럼 활동지원사 선생님께 톡이 온 거예요.

“휴일인데 뭐 하십니까? 답답하면 조금 걸을래요?”

평소 이동 지원을 주로 도와주시니, 휴일이라서 연락을 드리기도 그렇고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다가 용수철 튕기듯 답문을 썼습니다.

“완전 좋아요. 샘 몇 시 준비하오리까?”

 평일에 그토록 기다리던 연휴였건만, 이틀을 못 참겠는 거예요.

특히 오늘처럼 별다른 외출 일정 없이 하루 이상을 보낸 데다가 집안 공기마저 혼탁할 때는 시간이 굼벵이만 같습니다. 밖에 나와 걸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더라고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일지, 자기 통제력 없는 어른이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를 닦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냥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남편은 저와 성향이 완전 반대인 사람이에요.

로또처럼 절대 맞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는 저에게 없는 그의 면모가 매력적으로 보였어요.

재치만점에 늘 밝은 기운으로 마이너스 텐션인 저를 웃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계획성 없는 저와는 다르게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계획을 촘촘하게 짜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경제관념도 남달라서 적금이다 펀드다 제 귀에는 무슨 포르투갈어처럼 들리는 계산식과 퍼센티지를 줄줄 읊어요. 

유독 ‘숫자’에 어두운 저로서는 제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크게 보일 수밖에요.

유쾌하게 농담을 잘하는 것도 그때는 분명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철저한 계획표에 의해 사는 남자는 무계획이며 경제관념 없는 여자가 견디기 힘듭니다.

여행을 갈 때도 그쪽은 커피믹스까지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쪽은 짐을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해요. 신발정리 안 해서 투닥거리는 것이야 둘이 풀면 그만이지만 아이 교육은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네요.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책도 종종 읽게 되잖아요.

엄마 몰래 학원 째기, 성적표 빼돌리기 뭐 이 정도는 거의 애교 수준이거든요.

책에서 볼 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내 아이가 학원을 가지 않겠다 하니 신경이 곤두서고 마는 거예요. 사람 마음 속절없이 간사합니다.

이래서 이론과 실제가 다른가 봐요.

 유주가 중학교 첫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 전주부터 밤 10시까지 카페에서 친구들과 공부하시고, 스트레스 엄청 받는다고 으름장을 열 번 정도 놓으셨으며, 과학 시험이 남았음에도 영어 수학 시험 끝이라고 학원을 이틀이나 째면서 아주 동네 시끄럽게 1차 고사를 치렀어요.

“엄마, 내 친구 가영이가 영어 시험 망쳤다고 엄청 우는 거야. 그래서 애들이 도대체 몇 점 나왔길래 그러냐고 물어봤거든.”

“응, 진짜? 몇 점 이래?”

“엄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현장은 우리 집, 듣는 이는 아빠뿐인데, 유주 제 귀에 대고 속삭거립니다.

“대박, 진짜 속상하겠다. 어쩌냐! 근데 가영이 점수 알았으면 유주 것도 나왔겠네.”

“가채점이라 더 떨어질 수도 있고, 아직 몰라.”

단호하게 말하더니, 제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날 이후로 1주일이 흘렀습니다. 늦은 저녁, 슬쩍 시험 성적을 물었어요.

“엄마 스읍 이거 하면 안 돼. 표정 변화 안 돼. 진짜 뭐라고 하지 마.”

제가 딸아이에게 방울뱀 소리를 종종 내거든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엄빠는 뒷골을 잡고, 우리 가족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할 텐데, 부디 해피엔딩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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