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 지금‘ 카야’

by 밀도

메인 풀에 떠다니다가 작은누나 손잡고 바다로 나갔어.

몇 발짝 걸어가니까 완전 동해안.

모래가 엄청 곱고 돌멩이 하나 없더라.

조개껍데기라도 있을까 싶어 열심히 만져 봤거든.

미역줄기 한 오라기 안 걸려.

파도가 제법 높았어.

할머니가 튜브를 사수하시고는 위험하다며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처음에는 무릎 높이까지 들어가 뻣뻣하게 선 채로 바다를 감각했어.

그러다가 물살에 떠밀려 점점 뒤로 뒤로.

파도 끝자락에 철푸덕 앉았어.

다리를 쭉 뻗고 파도가 내 몸을 때리는 대로 굴러다니다가 아예 누워 버렸는데,

오‘!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땅바닥에 내 몸이 닿아 있으니 우선 무섭지 않고, 파도가 밀려오면서 피부를 적시는 느낌이 퍽 부드러웠어.

우연인지 필연인지, 강산아 누나 바로 어제 달랏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읽은 책 제목이 『칼라하리의 절규』였잖니.

델리아 오언스. 마크 오언스 부부가 쓴 진짜 야생 동물 관찰기.

“젊은 생태학자 마크와 델리아 오언스가 아프리카 칼라하리에서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자, 갈색하이에나, 자칼 등 온갖 동물의 행동과 생태에 관하여 연구한 과학보고서이자 그들과 자연을 공유하며 겪은 이야기들을 묶은 휴먼드라마이다. 말이 쉬워 오지 생활이지 보통 사람들은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마실 물이 달랑거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자동차를 타고 염전 위를 지나던 중 소금층이 갈라지며 땅 속으로 가라앉을 뻔했던 사건, 기름통에 구멍이 나거나 자동차 부속품의 일부가 달아나 그 넓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꼼짝없이 버려질 위기에 처했던 일 등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사자나 하이에나에게 공격당하기 일보직전에 가까스로 피해 목숨을 구한 수많은 일까지…. 살인적인 더위와 추위, 넉넉지 않은 음식과 자금, 기약 없는 연구 성과, 외로움과 싸우면서 아프리카에서 멸종해 가는 동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광활한 벌판을 누비면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 〈칼라하리의 절규〉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누나가 왜 뜬금없이 이 시점에서 책 얘기를 하냐면.

온몸으로 파도를 느끼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자니, 내가 마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가 된 기분인 거야.

응,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델리아 오언스의 첫 소설인데, 출판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단다.

“어느 늦은 오후, 체이스 앤드루스를 지켜본 후에 카야는 판잣집에서 걸어 나와 마지막 파도가 휩쓸고 가 매끄러워진 모래사장에 하늘을 보고 눕는다.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젖은 모래에 스치다가 발끝을 모으고 다리를 쭉 뻗는다. 눈을 꼭 감고 서서히 바다로 몸을 굴린다. 그녀의 골반과 팔이 은은히 빛나는 모래를 눌러 자국을 남긴다. 카야의 움직임에 따라 모래가 찬란하게 반짝이다가 그늘진다. 파도 가까이로 굴러가면서 카야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대양의 포효를 감지하고 몸으로 질문을 느낀다.

물거품이 이는 파랑이 해변으로 밀려와 손을 뻗는다. 간질일 거라는 기대감에 카야는 깊은숨을 쉰다. 점점 더 느리게 몸을 굴린다. 한 번 회전할 때마다, 얼굴이 모래를 스치기 직전에, 고개를 살짝 들고 태양과 소금기가 밴 바다 냄새를 맡는다. ‘이제 다 왔어, 거의 다 왔어. 곧 닥칠 거야. 언제 느낄 수 있을까?’”

습지에서 혼자 성장하는 소녀 카야의 이야기 속 한 대목이야.

누나가 누워 있는 곳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가면 지문이 찍히 듯 내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남는 것이 재미있었어.

귓바퀴에 정통으로 파도를 맞아 잔뜩 들어간 물 빼려고 머리 기울인 채 우스꽝스러운 꼴로 모래사장을 콩콩 뛰면서도 웃음만 나는 거야.

짠물맛을 톡톡히 보고도 일어나기 싫더라니까.

그렇게 땅바닥에 등 붙이고 누워서 하늘을 상상할 뿐인데, 치명적인 해방감이 출렁거렸어.

작은누나가 내 곁에 서 있었거든.

두목과 쌍둥이는 우리보다 더 바다 안쪽에 있어서 작은누나 시선은 그쪽을 보고 있었고.

유주가 어떻게 노는지, 사나운 파도 무섭지는 않은지 살펴볼 정신도 없이 난 내 오감에 골몰했단다.

완벽하게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 벅차더라고.

앞뒤 없이 드는 생각.

‘이 나라에서라면 내 개인 기사 두고 살아도 되겠다. 나 오토바이 좋아하는데. 적어도 이동 면에서만큼은 눈치 보고, 맘 졸이고, 시시각각 예약하고, 기다리고, 안내 부탁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지 모르는데….

요리 못 해도 음식값싸지, 인건비 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왕자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