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아 거기 여름은 어때?
나는 더위 핑계로 깨끗하게 운동을 접고 몇 달 살다가 막내 누나 덕에 오늘 모처럼 10000보를 찍었어.
아침 산책, 무조건이여라.
그러니까 습습한 이 더위에 하루하루 개학이 다가오고 있잖니.
이 시점에서 누나가 하게 되는 것.
학기 중에는 마주 앉아 여유 있게 수다 심공에 빠질 수 없는 소중한 이들과의 만남을, 마치 12시가 되기 전 유리구두 단속하는 신데렐라 마냥 다급하게 챙기는 거야.
어제는 목포, 오늘은 대전, 내일은 서울 이런 식으로.
동생들이 누나를 ‘김길동 씨’라고 부른다니까.
이쁜 딸 데리고 캐나다 갔다가 1년 반 만에 귀국한 멘토 언니, 동종 업계 종사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조언에 고민 상담에 전화기가 닳는 시각장애 선배 부부, 세 여자가 나란히 흰 지팡이 들고 카페다 갈빗집이다 찾아다니며 먹고 웃고 말하는 맹학교 선배 언니들까지 어느 한 팀 포기할 수가 없잖아.
모두가 누나와는 3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 오면서 함께 40대가 된 동지들이야.
강산아, 누나가 혼자서 흰 지팡이 들고 집을 나서면 심심치 않게 착한 사람들의 짧은 선의들을 경험하게 된단다.
며칠 전에는 장애인콜이 안 잡혀서 일반 택시를 탔는데,
“저어, 혹시 선생님이세요?”
“네? 아, 네에.”
“저어, 새미…”
“헉! 아버님이세요? 아이고 안녕하세요. 새미샘 같이 일할 때 아버님 택시 하신다고 듣긴 했었는데…. 애기들 많이 컸겠어요.”
“네. 안 그래도 오늘 새미 집 가기로 했었는데 일 생겨서 다음에 가려고요.”
“오랜만에 저 새미랑 통화해야겠어요.”
“선생님, 카드 꺼내지 마세요.”
“오오, 아니에요. 아버님.”
끝끝내 요금을 안 받으시는 거야.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새미, 안녕? 아이들 잘 크지? 나 오늘 아버님 택시 탔잖아.
한사코 요금도 마다 하시고 글쎄 나 역까지 태워 주신 거 있지.”
“오오, 언니 잘 지냈지요? 친정 갈 때마다 생각은 했는데, 두 아이 챙기느라 연락도 자주 못했어요. ”
갓 대학 졸업해서 우리 학교 기간제할 때 누나 카풀해 줬던 예쁜 동료였어.
유학에 임용고시에 결혼에 출산까지 가끔 만나도 한결같구나.
그날은 서울에서 약속이 있었어.
세 여자가 흰 지팡이를 들고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이 시골 맹인 말고 그녀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동네.
맹인들에게는 특별히 사장님이 직접 갈비를 구워주시는 식당이라 언니들이 종종 간다고 했어.
용산역에 도착하여 코레일 직원에게 1호선까지 안내를 부탁했지.
A선배를 만나기로 한 종로 3가에 무려 20분이나 일찍 당도한 거야.
거기까지는 좋았어라.
같이 3호선을 탈 계획이었는데, A가 오는 것보다 내가 그냥 가는 게 낫겠더라고.
직원 호출을 시도했어.
이상하게 계속 없는 번호로 나오더라.
와중에 원고 독촉 전화는 오고.
당장 필요한 전화 연결은 안 되고, 땀은 나고, 시간은 가고….
다산콜로, 용산역으로, 지하철공사로 열심히 전화를 걸어봐도 어쩜 그렇게 연결이 안 되냐고.
우리 강산이랑 같이였다면 단 10분 컷도 아니었을 텐데….
응답 대기하는 동안 A와 B 전화를 못 받으니 언니들도 슬슬 짜증이 난거지.
일이 꼬이려니까 카카오지하철 앱에 있는 전화번호도 내가 잘 못 눌렀던 모양이야.
겨우 직원 접선에 성공, 결국 약속 시간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지.
우선 뿔이 난 선배들에게 사과부터 하고.
흰 지팡이 든 세 여자가 십여분을 또 걸어 간신히 갈빗집을 찾았어.
너무 기운을 빼서 그런지 고기 굽는 불판 열기마저 버겁더라.
원래 배고프면 너나 나나 예민해지는 법.
김치에 밥 한 그릇 먹고 나니 비로소 멘탈이 살아난 거야.
다음 코스는 카페.
시원한 밀크티 빙수를 앞에 두고 앉기까지 다시 한오백년 소요.
건물 앞까지는 어찌어찌 찾아갔는데, 입구를 못 찾아서 지나가는 행인 1, 2, 3에게 SOS.
그렇게 먹은 빙수니 오죽 달았겠니.
커피까지 한 잔씩 더 시켜 마시며 한참을 웃고 또 웃었네.
‘카카오 지하철’이니, ‘보행 내비게이션’이니 세련된 그대들이여.
덕분에 즐겁고 고마웠소.
다음에는 늦지 않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