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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

by 밀도

강산아 이제 내일부터 출근이구나.

3주 방학 기간 동안 짧은 출근을 며칠 했고, EBS 교육 방송을 들었고, 특별히 비행기 타고 현지로 날아가 아로마와 타이마사지를 받았고, 시립도서관 출석이 매우 저조했고, 보고팠던 벗들과의 만남을 부지런히 누렸어.

엄마가 이러고 돌아다니는 사이 딸은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고, 집에서 문제지를 펴지 않았으며 2박 3일 여름 수련회에 5박 7일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던 거야.

유주 학급에서 말이지.

방학을 맞아 지극히 민주적인 투표로 학생의·학생에 의한, 학생을 위한 과제를 정했다는데, ‘학원 잘 가기’는 0표, ‘부모님 말씀 잘 듣기’는 1표, ‘잘 놀기’는 몰표가 나왔다는구나.

그리하여 공식적인 유주 방학 숙제는 ‘줄넘기’가 되었다고.

어머니가 사력을 다 해 벗들과의 시간을 갖느라 고작 월간 독서평설 체크하는 것도 빠듯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 수학은 잠시 중단.

나 보기에는 유주 충분히 쉬고 놀고 또 잔 것 같거든.

히딩크 감독님도 아니건만 “I'm still hungry.”를 무슨 독립투사마냥 외쳐대는구나.

유주는 학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해.

그래서 개학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딱히 없는 친구란다.

고마운 녀석이지.

문제는 나야.

개학이 다가올수록 스멀스멀 어떤 그 찰지고 느낌적인 압박감이….

누나 ‘학교’라는 공간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 책임이 따르는 ‘일터’ 라서인 거니?

2학기는 하산할 때처럼 유독 빠르게 흘러가잖아.

매학년 말은 아쉬움만 쌓이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다시 운동화끈 조여 보련다.

강산아, 오늘 누나는 『아무튼 친구』라는 에세이를 읽었어.

양다솔 작가 작품인데, 역시 재미져.

며칠 전에 대전 가는 기차 안에서는 김혼비 작가가 쓴 『아무튼 술』을 읽었거든.

아주 웃음 참느라 혼났다니까.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거술’, ‘밖혼술’ 등 신조어를 제조하사 그것을 즐기며 몸소 실천하시는 저자의 결연한 일편단심이어라.

양다솔은 이슬아의 친구인데, 이슬아가 ‘일간 이슬아’를 발행할 때 썼던 생일 축하 편지래.

“이제 너는 정식 작가가 됐네.

이슬아 문학 센터가 오픈할 날도 머지않았어.

동시에 나의 꿈 건물 청소 노동자에도 한 걸음 가까워졌군.

편지를 받았을 때 이슬아는 ‘자조를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하다니, 얘는 시간이 졸라 많나?’ 했다고 한다.”

이슬아 작가의 『아무튼 노래』에는 이런 꼭지가 있어.

“선생님은 시각장애인이고 수필을 쓰는 작가이다. 일간 이슬아의 구독자이기도 하다.

그분이 시각장애인 독자로서의 어려움을 알려주신 덕분에 일간 이슬아에 낭독 코너가 생기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글은 조용한 시골에서 일상을 보내다가 아주 오랜만에 서울에 왔던 날에 쓴 것이었다. 중학교 동창들과 노래방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글의 일부를 이곳에 옮겨 적는다.

나에게 오후 여덟 시쯤의 산책은 그 자체가 일탈이었다. 외국인들로 붐비는 이태원 거리의 풍경은 시골 맹인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터키 음식 냄새가 골목에 가득했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이 살벌하게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친구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한 우리는 작심하고 거리를 쏘다녔다. 내친김에 노래방을 찾았다. 중학교 때 애창하던 노래를 마흔 넘은 아줌마들이 부르고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신기하게도 열다섯 살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미있고 흥겨운 현장에서 뜬금없이 눈물이 났다. 목청을 돋우며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내 표정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탬버린을 흔들며 깔깔거렸다.

이 글은 내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냄새와 소리에 집중하며 들뜬 맘으로 낯선 거리를 걷는 선생님의 모습을, 짤랑대는 탬버린과 깔깔대는 친구들과 신나는 노래 사이에서 재빨리 눈물을 훔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흥겨운 곳에서 홀로 잠시 서글픈 사람. 왁자지껄해서 더욱 커다래지는 고독을 마주한 사람. 눈물을 닦고 더욱더 크게 목청을 돋우는 사람….

선생님 귀에 들려왔을 친구들의 노랫소리를 상상한다. 지금껏 나는 노래방에 백 번도 넘게 갔지만 시각장애인에게 그곳이 어떤 공간일지는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노래를 듣고 부른다는 게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밀도 선생님의 듣는 능력은 볼 수 있는 사람보다 몇 배나 발달되어 있을 것이다. 청각 정보에 고도로 집중하는 훈련을 해오셨으니까. 그런 선생님 옆에서 중학교 동창들이 노래를 부른다. 마흔 살에 다시 부르는 열다섯 살의 애창곡들이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선생님에게는 꼭 어제 일처럼 들린다. 이보다 더한 타임머신이 있을까.”

이슬아, 이훤 작가와는 직접 만나 누나 점자책 읽는 모습 보여주며 밀도 있는 이야기 나눴었잖아.

‘일간 이슬아’에 소개됐던 인터뷰.

특별하고 소중한 인생 사건이었어.

아, 이훤 작가는 『아무튼 당근마켓』 저자이자 오늘날 이슬아의 남편.

그녀의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가 하루속히 시트콤으로 방영되면 좋겠네.

이밖에도 『아무튼 메모』, ‘떡볶이’, ‘’ 잠, ‘언니’, ‘사전’, ‘게스트 하우스’, ‘망원동’, ‘스릴러’ 등등 무궁무진하여라.

2학기를 앞둔 깊은 밤, 여기 이 머릿속은 “아무튼 개학 개학 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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