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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맛

by 밀도

강산아 누나 지독하게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잖아.

도망을 치다치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발표나 촬영 같은 거 할 때 엄청 스트레스받아하고.

‘좋다, 싫다’ 표현도 잘 못하고.

화나는 것도 미련하게 참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어설프게 표출하고.

그래서 누나 눈에는 공식 석상에서 말을 유려하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커 보이나 몰라.

강원국 작가님이 쓴 『결국은 말입니다』, 『어른답게 말합니다』, 『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흥미롭게 읽었어도 이게 또 이론과 실제가 달라요.

누나가 즐겨 듣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이 있어.

진행자가 정말 물 흐르듯이 말을 하거든.

언론인들이야 말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한다지만 말의 리듬과 목소리, 발음 같은 것이 유독 귀에 감기는 사람이 있는 거야.

정지영 아나운서는 누나 대학생 시절 밤 12시에 음악 방송을 진행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느낌 그대로 라디오를 진행하더라.

어쩜 늙지도 않나 봐.

‘자기표현’,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공부하고 훈련하는 궁극적인 목적일진대.

누나는 글로 쓰라 하면 그런대로 끼적거리는 데에 별 부담이 없거든.

그런데, 왜 이렇게 같은 내용도 말로 하는 것이 힘드냐고.

오래전 기억이야.

시사 프로그램에서 한 코너를 맡아 고정 출연하던 게스트가 인기에 힘입어 단독 방송 진행자로 발탁됨에 따라 부득이 하차를 하게 된 거지.

마지막 방송을 하고 청취자들에게 인사를 했어.

타 방송 프로그램 호스트로 출발하는 게스트에게 진행자가 하는 말.

“혹시 잘 안 되시면 다시 돌아오세요.”

웃기기도 하고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더이다.

‘이거 덕담 맞음…?’

누나가 친구에게,

“나 어제 출판사랑 계약했음. 내년에 책 내기로.

인세는 판매가의 10%”

“오오, 백만 부 팔리면 십억이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웃기고 기분이 가 좋더라고.

어렵사리 행사 협조를 당부하는 선생에게,

“선생님, 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이지요. 제가 오늘 아침부터 미용실 갔다가 학교 왔잖아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선생님 설명해 주시니까 아주 귀에 쏙 쏙 들어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무턱대고 고마워지는 거야.

반면 찰나의 몇 마디가 가혹하도록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어.

가령, 고민고민하다가 용기 내어 도전하는 사람을 보고,

“모르겠다. 니가 하는 일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뭐 나중 되면 알겠지.”

“너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

긍정의 언어, 온유한 어투, 활기찬 기운.

강산아, 도대체 어디 가면 살 수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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