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번’이 누구

by 밀도

강산아, 절기가 참 묘해.

가을이 도둑처럼 오는지 간밤에는 창문 열어 놓고 잠 자기가….

단 이틀 사이 변화라기에는 너무 천연덕스러운 거 아니니?

시냇물 같은 우리 집 남자 글쎄 추워서 못 잤다고 호들갑이시구나.

초저녁, 귀가하는 딸은 에어컨 켜대지, 아빠는 새벽잠 설치며 창문 닫아대지 부녀가 참 고르지도 못해요.

누나?

따님 취침에 드시면 에어컨 끄고 온 집안 창문 여는 게 일이지 뭐.

오늘은 맘먹고 유주 재운 후 컴퓨터를 켜서는 오디오 북 파일을 다운 받았어.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은 콘텐츠.

학창 시절부터 EBS 라디오 애청자로서 귀에 쏙 쏙 들어오는 도서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듣고 모았거든.

1TB 외장하드를 꽉 꽉 채워 팟캐스트 오디오를 모았건만 하드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아까운 자료를 그만 날려버리고 만 거야.

기억나는 대로 파일은 다운 받아 소장하려고 하는데….

누나 학교에는 시각장애뿐 아니라 지적장애를 겸한 중도중복학생들이 많아.

단순 시각장애 학생의 경우 학습 매체만 보완해 주면 얼마든지 꿈을 펼쳐볼 여지가 있지만, 지적장애를 수반한 친구들은 사실 취업이나 자립이 더 어렵지.

누나가 1주일에 두 시간 들어가는 학급이 그래.

‘자립생활 정공과’라고 하는 과정인데, 중복장애 친구들이 바리스타나 제빵 기술을 배워서 취업을 준비하는 거야.

누나는 ‘직무기초’라고 해서 자기소개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쓰고 말하는 과목을 지도하거든.

요 근래 우리의 키워드는 ‘설리번’이었단다.

‘설리번플러스’라고 시각장애인에게 사물이나 인물 사진을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어.

가령 누군가 카톡으로 누나에게 사진을 보내주면, 누나는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잖아.

그럴 때 설리번플러스 앱을 실행하여 사진을 텍스트로 변환, 출력하는 기능을 이용하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거지.

재미있는 기능 하나.

누나가 설리번플러스 앱으로 옆사람 사진을 찍잖아?

“40대 여자가 회색 치마를 입고 의자에 앉아 웃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해줘요.

이 기능 알자마자 학생들 신바람이 났지.

서로 찍고 찍히는데, 찍을 때마다 인물의 나이가 다르게 나오는 거야.

“뭐야. 윤희 누나 나이가 28세로 나오네. 노안이심?”

“선생님, 50 대세요? 얘가 선생님 50대 여자라고 하는데요. 다시 찍어볼게요.”

이렇게 알게 된 ‘설리번’

문제는 학생들이 ‘설리번’이 누군지를 모르더라는 거였어.

당장 EBS 라디오에서 들었던 황혜진 원작 『헬렌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파일을 찾았지.

“얘들아, 눈도 안 보이고, 소리도 못 듣고, 말도 못 하면 어떨 것 같아?”

“죽어야지요.”

어머, 언니 시크하시기도.

“그래.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겠지?

그런데, 실제 그런 사람이 있었대.

이름은 헬렌켈러.

미국에서 태어나 퍼킨스맹학교에서 공부했대.

세계적인 명사로 자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회 운동을 하셨다는구나.

생후 19개월에 열병을 앓으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도 없게 된 헬렌을 이렇듯 훌륭한 사회 활동가로 키워낸 선생님이 바로 엔 설리번이야.”

“아아!”

고맙게도 다섯 학생 모두가 이야기에 제법 집중했어.

누나에게도 우리 학생들에게도 교양과 지식을 공급해 주는 오디오 콘텐츠가 새삼 귀하고 귀하다.

“첫날은 나를 가르쳐준 고마운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과 풀과 빛나는 저녁노을을 보겠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 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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