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10월입니다. 올여름은 유독 덥고 길었잖아요.
독자님들 가을맞이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가을’하면 으레 독서가 국민 화두로 떠오르는데요. 독자님들은 1년에 몇 권 정도 책을 읽으시나요?
천고마비 하는 이 계절, 재미난 소설 한 편 추천드리려고 합니다.
성해나 작가의 『빛을 걷으면 빛』이라는 단편소설집이에요.
2024년 ‘젊은 작가상’ 수상자로 그녀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2023년에 발간된 『두고 온 여름』도 재미있더라고요.
문학동네에서 펴낸 『빛을 걷으면 빛』에는 저자의 작품 8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언두’, ‘화양극장’, ‘오즈’, ‘김일성이 죽던 날’ 등 진중한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에는 묵직한 틈새가 있어요. 소란스럽지 않은 감동과 사유를 가만히 건넵니다.
첫 작품 ‘언두’는 젊은 여성 유수의 관점으로 서술돼요.
데이팅앱에서 가볍게 만난 남자친구들 중 한 사람인 도호. 별 기대 없이 나간 첫 만남에서 유수는 예기치 않게 도호 집을 방문하게 되고, 농인 할머니와 맞닥뜨립니다.
“나는 중간중간 도호에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도호는 수어로 했던 얘기를 친절히 되풀이해 주었다. 할머니가 복지관에서 온누리 상품권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나, 도호의 사촌 조카가 얼마 전 수두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그는 귀찮은 기색 없이 반복했다. 한 박자 늦게 웃고 한 박자 늦게 맞장구치며 그들의 흐름에 맞추려 노력했지만, 그것도 얼마 안 지나 버거워졌다.”
수화를 할 줄 모르는 유수는 도호를 통해야만 할머니 언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한 단계 필터를 거치는 번거로움이 쌓이면서 오해 혹은 소외가 싹트기도 해요. 함께 웃지 못하고 꼭 한 박자 늦게 전달받는 정보, 정확히 짚어낼 수 없지만 뭔가 서견치 않은 뉘앙스 앞에 유수는 선명한 구름 속을 경험합니다.
왜 우리도 종종 그럴 때 있잖아요.
소리 없는 어떤 공기 혹은 시선이 느껴지거나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 딱히 말로 꼬집기 애매한 어떤 순간들.
함께 공연을 관람하거나 예능을 볼 때 화면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게 되는 그 한 박자 느림.
익숙하고 사소하지만 번번이 고속도로에서 속도 방지턱을 마주한 것처럼 아닌 척 씹어 삼켜야 하는 달갑지 않은 감각.
“할머니는 완고하게 한 가지 동작만을 반복했다. 오른 손등을 모로 세운 뒤 왼 손바닥에 스쳐 내리는 동작이었다. 한숨과 분노, 체념 끝에 도호는 목사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까지 안 주면 여기 뺀대요.
목사는 땀을 훔치며 다음 달까지만 어떻게 안 되겠냐고 거듭 물었다. 도호는 그 말은 통역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못 들은 체했다.
도호와 목사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부끄러워졌다. 도호도 목사도, 그곳에 있는 모두가 낯부끄러워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 오직 할머니만 태연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도호를 부추기고 들쑤셨다. 도호는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왔을까. 상황이 악화될수록 도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얼빠진 얼굴로 그는 목사에게서 받은 말을 할머니에게로, 할머니에게서 받은 말을 목사에게로 계속해 옮겼다.”
억척스럽게 세를 받아낸 할머니는 도호와 유수에게 소고기를 사줍니다.
할머니에게 가 닿지 못하는 세상의 무수한 표정과 단어와는 별개로 콘크리트벽 같은 그녀의 세계는 차곡차곡 구축돼요.
휴대폰 어플과 온갖 몸짓을 동원하여 겨우 성사되는 몇 마디 의사소통에도 유수는 부담감을 느낍니다. 결국 도호가 되지 못하는 유수는 도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별을 택하지만 할머니 방에서 흘러나오던 ‘사랑만 고집했던 어리석은 난 당신이 전부였―는데’ 노랫말을 오래도록 흥얼거려요.
작품 전반의 분위기가 퍽 차분합니다. 호들갑스럽지 않으면서도 저자의 따뜻한 통찰이 엿보여요. 음악을 듣지 못하는 할머니가 뽕짝을 틀어놓은 채 거들과 슬립 차림으로 춤추는 모습.
유수 눈에 몸부림처럼 비친 그 자유가 어쩌면 할머니의 고립된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원초적인 힘 아니었을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과연 어디까지가 가능할까요?
성해나 소설을 통해 언어, 배경, 문화가 다른 사람 사이 간극 혹은 한계, 소통, 이해와 오해,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개별적·사회적 갈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