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잘 잤어?
새벽 댓바람부터 웬 인사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누나 정확히 2시 5분에 잠에서 깨어 꼬박 네 시간을 듣고, 읽다가, 기어이는 자리 털고 일어나 쓰는 중이야.
지금 막 마지막 연재 원고를 마감했단다.
그 사이 아마 훤하게 동이 텄겠지?
벌써 3년 되었더라.
점자도서관 월간지에 수필을 연재해 온 것이.
다달이 마감 지키는 것이 퍽 즐거웠어.
그냥 뭔가 게을러지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같았거든.
그런데, 36개월 동안 쓴 글을 되짚어 생각해 보건대.
‘아! 독자들이 식상할 수도 있었겠다.’
한 방 없는 여자의 소소한 일상 속에는 빌런도 비밀도 못 다 이룬 사랑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아! 수필이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그래그래. 맞다 맞아.
어떤 갈등 상황이나 사건 사고 같은 요소들이 양념처럼 들어가야 이야기에 재미가 사는 법이거늘.
누나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열망에 그만….
그래 강산이 말대로 내가 연재한 글은 수필이었으니 극적인 재미보다는 진솔한 나의 경험을 쓰는 것이 맞았을 거야.
그런데, 그 솔직한 경험이란 것이 말이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얘기에 그친 것 같고, 적정 수준으로 포장한 ‘나’를 쓴 것 같고.
누나는 가공되지 않은 어떤 날 것의 역동성이 무턱대고 좋거든.
‘익명성’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자유로워지는 어떤 해방감 같은 것.
달리 말하면 아는 사람 사이에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사회적 예의나 규범이 때로는 피차 날 것으로서의 대면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거지.
‘위선’ 혹은 ‘위악’의 차원을 너머 서서 상호 간 타격을 겁내지 않는 저돌적인 민낯.
소설이라면, 예술이라면….
누나가 요즘 30여 년 전 버전으로 드라마 『토지』를 다시 듣고 있어요.
‘그 시대에는 여성을 자손 생산 도구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구나.
같은 양반이어도 하인을 대하는 데에 사람의 인품과 인격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었구나.
불구자와 무당, 백정은 천대받는 쪽도 하는 쪽도 의당 마땅한 종자들이었구나.
제물을 탐내고 모사를 꾸미고 약자를 수탈하는 야만적인 인사가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사람 같은 몰골로 흡혈귀가 되어 민초들의 피를 빨았구나.
서희 아기씨의 시퍼런 서슬이 차라리 대견함이요, 곰보 목수 윤보의 뼈 있는 언사가 핵사이다요, 강청댁을 위시로 최참판 댁 마님이며 봉순네 목숨을 싸그리 쓸어간 괴정이 코로나만 같아서.’
작품 속에서만큼은 너나 나나 끝까지 노골적이어도 괜찮은 거야.
왜 그 「82년 생 김지영」도 시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 다 했잖아.
너무 매력 있지 않니?
강산아, 나 진짜 소설 쓸 수 있을까?
그냥 불편한 얘기도 예의 없는 언사도 피차 타격감 없이 깨끗하게 허용되는 판.
링 위에서 스파링 하는 복서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그나저나 『토지』에 등장하는 배우들 사투리가 어쩜 이렇게 찰질 수가 있단 말이니.
“이놈에 살림 탕 탕 뽀사뿌리고, 절로 가든지.”
강청댁 표독도 월선의 사랑도 슬프기는 매한가지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