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이 지났습니다. 출근 복장이 제법 무거워요. 패딩 점퍼를 꺼내 입고 목도리도 두릅니다. 딸아이가 목까지 지퍼를 잘 올렸는지 손으로 확인하며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릅니다.
“물통 챙겼어? 지갑은? 휴대폰이랑 티슈 넣었지?”
매일 똑같은 우리 집 아침 풍경이에요.
“양치했어? 엄마 오늘 늦으면 안 된다니까. 밥 딱 한 숟가락만 먹자.”
딸아이는 천하태평입니다.
“응 다 했어. 아침 안 먹고 싶어.”
저학년 때는 싫어도 밥 먹고 가야 키가 큰다고 설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안 통하네요. 번번이 식사 문제로 신경전을 벌입니다.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은 부모 마음과 잔소리 듣기 싫은 사춘기 소녀 마음이 충돌해요. 화가 끓었다가 걱정이 끓었다가, 애써서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종료시킵니다. 결국 아침밥을 안 먹는 날이 생기고, 저녁도 친구들과 마라탕이며 떡볶이, 라면 등을 사 먹는 날이 종종 있어요. 6학년이 되니 녀석들도 저희들만의 플랙스 코스를 즐기더라고요.
주말이면 삼삼오오 약속을 잡습니다. 단골 메뉴는 단연 ‘마라탕’이지요. 탕후르로 후식을 먹은 다음, 코인 노래방에 갑니다. 노래를 한바탕 부른 뒤에는 동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줄넘기도 하며 놀아요. 뽀로로만큼이나 노는 게 제일 좋은 6학년이랍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모든 것이 막연하고 두렵기만 했어요. 매학년 초 학생 조사 카드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저의 장애 정보를 기입했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선생님 시선이 따뜻했으면…’
장애에 대한 오염된 편견이나 동정 같은 불순물은 부디 섞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년 새롭게 만나는 담임선생님께 간략한 메모를 보냈어요.
감사하게도 여섯 분의 담임선생님 모두가 아이에게 참사랑과 교육을 선사해 주신 덕분에 딸아이는 명랑하게 자랐습니다.
“엄마, 오늘 우리 선생님 엄청 화나서 색연필로 교탁을 탁 쳤는데 그게 부러졌다. 아니 신지한이 내 엄마 선생님이라니까 안 믿는 거야.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선생님을 하냐면서 말도 안 된다고 막 그래서 걔 혼났다.”
평소 목소리도 높이지 않으시던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을 깨 주시려고 부러 과하게 반응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인이라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어.”
제 입장에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고마운 선생님이시네요.
“어머니, 오늘 유주가 책을 한 권 주더라고요. 잠깐 읽어봤는데 책장이 술술 넘어가네요. 잘 읽겠습니다.”
4학년 때 딸아이가 현관에 쌓여 있는 제 책을 한 권 슬쩍하여 담임선생님께 드린 거예요. 생각지도 못하게 전화를 받고서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 녀석, 저도 모르게 엄마가 쓴 책이라며 주변에 퍽이나 나누어 주고 다닌 거예요. 그 덕에 카톡으로만 소통하던 자모들 목소리를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유주가 우리 반에 있는 지적장애 친구를 참 잘 도와줘요. 유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너무 잘하고 있어요.”
5학년부터 2년간 같은 반인 지적장애 친구 이야기를 집에서도 자주 했습니다.
“엄마, 오늘 우리 모둠 활동하는데 수영이 그림 그리는 거 내가 알려줬거든. 근데 생각보다 잘하더라.”
“엄마 요즘 수영이가 짜증을 많이 부려. 책을 막 찢고 던지고 그런다.”
엄마 마음이라는 것이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어김없이 당부하게 돼요.
“수영이가 화났을 때는 유주가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우선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해. 수영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그럴 때도 네가 쫓아가면 안 되고 선생님께 말씀드려.”
“응, 알았어.”
2022학년도 졸업식에서 유주는 선배들의 중학교 진학을 축하하는 공연을 했습니다. 팝핀댄스 동아리에서 연마한 춤 실력을 유감없이 뽐냈어요. 2023학년도에는 방송부원으로 활동하며, 교장·교감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자막과 음악을 넣은 동영상을 제작했습니다.
한글도 제대로 모르던 병아리를 이만큼 키우고 가르쳐 주신 ‘이리동남초등학교’ 선생님들께 엄마는 무한 감사를 보내드릴밖에요.
중학교 배정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딸아이가 좋은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배우며 성장하기를, 시선이 고운 선생님 지도받아 ‘지’, ‘덕’, ‘체’를 고루 체화해 나가기를, 엄마는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