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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도 벚꽃도 내것은 아니지만

by 밀도

강산아, 그 동네 사람들도 드라마 좋아해?

누나는 드라마 없었음 어찌 살았을까 몰라.

화날 때, 도망치고 싶을 때 드라마 하나 잡고 정주행 하고 있으면 머리가 싹 비워지는 것이 아주 그만이거든.

요즘 누나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작품에 빠져 있어.

제벌 3세 사장님 홍해인과 똑똑한 서민 법무팀장 백현우 부부 이야기.

이혼 위기에 처했다가 서로를 향한 찐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는 줄거리.

순대국밥맛을 모르고 지하철을 타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가 당산에서 합정 가는 한강다리 지하철 저녁노을을 말하거든.

누나 중1 때 타고 다닌 바로 그 구간.

야맹증이 심했던 나는 하굣길, 합정에서 당산으로 넘어오는 철교를 지날 때마다 조마조마 해가 남아 있기만을 바랐었는데….

매일같이 2호선을 타고 다녔어도 노을빛 같은 것을 음미할 여유가 여력이 없었구나.

어느 등굣길에는 시청역에 사람이 너무 많아 밀리고 또 밀리다가 지하철과 플랫폼 사이에 다리가 쑥 빠져버린 일도 있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고맙게도 같이 떠밀리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내줘서 다시 출입문 안쪽으로 휩쓸려 들어갔다니까.

인산인해를 피부로 체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는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서비스 덕에 누나 혼자 드라마를 감상하는 데도 제법 밀도가 있어.

“해인이 현우를 차갑게 쏘아본다.”

“현우의 눈빛이 흔들린다.”

“은성이 비릿하게 웃는다.”

『눈에 선하게』라고 화면해설 전문 작가님들이 쓰신 에세이도 있더라.

당근 읽어봤지.

누나에게는 사정없이 고마운 분들이잖니.

험한 세상 속 빛나는 별 같은 선한 손길들이 귀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노을이, 벚꽃이 소리가 되어 내 귀에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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