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점자로 쓴 다이어리』가 출간됐다. 친정어머니 집 현관에 책 박스가 쌓여 있었다. 갓 구운 빵같이 온기와 향기를 뿜어내는 종이책을 만지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다. 매끈한 표지에 인쇄된 익숙한 점자가 생긋 웃고 있었다. 1만 시간이 족히 녹아 있을, 불면의 밤을 갈아 넣은 나의 분신이었다.
원고 세탁 폴더를 만들고 1차, 4차, 9차 맞춤법 검사를 했다. ‘나는, 내가, 내게, 의’를 대폭 삭제했다. 주격 조사가 만들어내는 문장의 뉘앙스 차이를 똑똑히 배웠다.
평생 인쇄업에 종사하셨던 친정아버지 덕에 마지막까지 이 잡듯 오타를 가려낼 수 있었다.
스트립쇼라도 한 듯 얼굴이 홧홧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지만 심적으로 유대가 없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개인적 사유가 오픈되는 것이 꽤나 신경 쓰였다.
반대로 출간을 기다리며 응원해 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산고 끝에 태어난 내 책을 선물하는 기쁨은 컸다. 생각지도 못한 친정 부모님 지인들 박수를 받았다.
4학년 유주가 담임선생님께 책을 선물하겠다며 냉큼 가방에 챙겼다. 조심스러웠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술술 읽힌다는 감상평이 퍽 고마웠다.
그런데, 정작 평설을 써주신 김학 교수님이 안 계신다. 전주 신아문예대학뿐만이 아니라 이 땅 어디에서도 교수님을 만날 수 없다.
6년 동안 스승님 밑에서 공부했다. 글을 써놓고 제목을 뽑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제자 작품을 자상하게 매만져 주셨다.
‘아픔은 아픔을 위로한다.’를 ‘아픔은 아픔을 위로하고’로, ‘돈가스와 곰탕’을 ‘돈가스 남편과 곰탕 아내’로, ‘우리 집을 찾아라’를 ‘우리 집을 찾아서’로 고쳐주셨었다.
제자들 작품을 더 넓은 지면으로 인도하셨고, 발표된 작품은 일일이 코팅하여 금일봉인 양 필자에게 돌려주셨다.
인자한 스승님 닮은 저서들은 서정적인 문체와 시선으로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을 앓이’, ‘하루살이의 꿈’, ‘손가락이 바쁜 시대’ 등 제목만 봐도 온기가 스며 나는 작품들은 꽁꽁 언 제자 가슴에도 위로의 불씨가 되었다.
늦가을, 사정없이 두들겨 맞으며 열매가 털리는 은행나무를 보고 언젠가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은행나무는 참 억울할 것 같아. 같은 나무인데도 어떤 나무는 곱게 물들어 꽃 피우고, 그걸로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잖아. 그런데 은행나무는 냄새난다고 구박받고, 심지어 열매를 내주면서까지 얻어터지니 얼마나 억울해!”
살면서 은행나무를 무수히 스쳤고, 은행잎을 책갈피에 꽂아 말리기를 즐겼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한 마음이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은행나무 처지가 어쩌면 장애인들의 슬프도록 치열한 운명과 닮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필아, 고맙다!”를 외치며 목요야간반 문우들과 소주잔을 부딪칠 때 분명히 행복했다. 더듬더듬 교수님 잔에 소주를 따라 드리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가닿기를 염원했다.
스승님은 표현에 서툰 이 제자의 사랑을 아셨을까?
60편 원고를 선별하고 6부 제목을 고심했다. 나희덕, 도종환, 최승자 시집을 살폈다. 작품 구성과 배열, 책 판형이며 표지 디자인까지 편집팀 지도를 받았다. 내게는 신아출판사가 다름 아닌 흰 지팡이였다.
발문을 받고, 교정지가 오가는 과정에 교수님 입원 소식을 들었다. 분명 3일 뒤에 퇴원하실 예정이었다. 원고 진행 작업을 짧게 보고 드린 문자에 스승님은,
“첫 수필집 출간, 영원히 기억할 일이지.”라는 답신을 보내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영원히 기억할 일! 영원히 기억될 스승님!
은사님 덕분에 저자가 되었다. 은행나무처럼 꿋꿋하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져 가리라.
넉넉하게 고요한 새벽이 비로소 숨통을 틔웠다. 스승님 떠나시고 꽉 막혔던 글줄기가 아프게 열렸다. 별이 된 칭찬 명인은 무조건 쓰는 제자를 기다리실 터.
밤낮없이 전송되는 메일이 안 와도, 익숙한 crane43@hanmail.net 계정을 다시 볼 수 없어도, 김민정 시인이 황현산 선생에게 그랬듯이 화려한 장미로 애도 의식을 표하지 못해도 스승님 향한 사랑 변치 않으리라. 수필과 더불어 사신 고인의 삶은 넘치게 훈훈했다. 순전한 존경으로 은사님의 명복을 빈다.